세상에서 인간이 사는 방식은 저마다 다양하다. 그건 인간마다 추구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이다. 부자로만 사는 게 인생 최고의 목표인 사람은 공자나 성경 말씀에 따라 욕심 없이 선량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과 친해지기가 쉽지 않다. 만일 어찌하다 결혼이라도 할 경우 노력을 한다고 해도 근본적인 차이는 극복하기가 어려우며 결국 파국을 맞이할지 모른다.
나는 미국에서 대학원 때 자기밖에 모르는 한 인간과 같은 아파트에서 함께 생활해 본 일이 있다. 자신과 가치관이 다르며 남의 고충에 대해서는 관심 자체를 두지 않는 사람과 현실적인 이해관계 때문에 함께 지낸다는 건 그 자체가 지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간에 대한 가치 인정 혹은 존중이 없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자신의 목적을 위한 하나의 도구가 되기도 한다. 게다가 그런 사람들은 특히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그때그때 말을 바꾸거나 거짓말도 쉽게 한다.
과거 성리학 중심으로 신분간 엄격한 차별을 통한 '예'와 '질서'를 또한 실리보다 명분을 중시해 오던 조선왕조가 쇠락하며 결국 몰락하고 서양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에 이어 과학기술 발전에 따른 물질 중심의 세상이 되었다. 그리하여 '휴머니즘'과 같은 전통적 가치관은 푸대접을 받고 그 자리를 돈과 물질 그리고 권력이 차지함에 따라 돈이 없는 인간은 인간으로서의 대접도 제대로 받지 못하게 되었다.
우리의 전통적인 것들 중에서는 美風良俗들이 참 많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세계적인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가 극찬한 '孝의 사상'이다. 지금은 연로한 노인들이 요양원이나 요양병원에서 쓸쓸한 노년을 보내지만 과거에는 한집에 3대가 함께 살았기에 어찌 보면 노후준비란 게 따로 필요가 없었다. 지금과 같은 세상에서 집안어른 특히 병든 노인을 집에 모시며 사는 일은 무척 부담스러운 일이긴 하다. 하지만 자신이 노인이 될 경우까지 함께 고려한다면 준만큼 도로 받기에 괴롭기만 한 일만은 아니다.
조선시대 때 남산은 과거에 낙방하여 몰락한 가난한 선비들이 모여 살던 곳이라고 한다. 만일 내가 그들처럼 초가삼간에서 겨우 밥이나 먹고사는 가난한 선비라면 어땠을까? 물질적인 풍요와는 거리가 있을지언정 성현들의 가르침이 있는 책을 가까이하며 서당에서 애들을 가르치면서 하루하루를 보낼 것이다. 애들에게는 자기밖에 모르고 또한 예의도 없는 인간이 아닌 참된 올바른 인간이 되도록 지도할 것이다.
지금도 집에서 애들에게 삶에 대한 이런저런 얘길 할 때 애엄마는 애들 앞에서 잔소리한다는 말을 하곤 한다. 환갑을 앞둔 나와 같은 연륜의 사람들은 젊은이들에게 해줄 얘기가 사실 무척 많다. 만일 말로서가 아니라면 글로서 이를 대신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은 값진 경험을 서로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 특히 기성세대들은 자신이 살면서 했던 시행착오를 혹여나 인생의 후배들이 반복하지 않도록 도와줄 도덕적 책임이 있다.
세상은 갈수록 물질화되어 가며 이기적이고 야박해질 것이다. 자신을 위해 평생을 희생해 온 노부모를 힘없고 가진 것 없다고 아예 거리로 내쫓아버리는 인간들도 있다고 한다. 이들은 자신이 노인이 되어도 자신을 지켜줄 돈이 있기에 그러한지는 모른다. 하지만 돈에 의존한 존재감은 그 자체가 허구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에릭프롬'이란 지식인이 했던 말이 생각난다. "사랑의 이유는 '~때문'일지 모르지만 사랑의 본질은 '~임에도 불구하고"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