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날의 행복'과 '부유한 날의 불행'

by 최봉기

김소운(1907~81)의 수필 '가난한 날의 행복'은 1978년 김소운 수필 선집에 발표된 수필로서 살림살이는 비록 가난해도 부부간의 사랑을 잊지 않음으로써 진정한 행복을 누렸던 세부부의 이야기를 통해 행복은 物質的 부유함에 있지 않음을 보여준다.


'가난한 날의 행복'의 첫 번째 일화는 가난한 신혼부부 이야기이다. 쌀이 없어 아침을 굶고 출근한 아내에게 실직한 남편은 어렵게 쌀을 구해 점심상을 준비한다. 따뜻한 밥 한 그릇에 찬으로 간장 한 종지를 마련한 남편은 초라한 밥상을 대할 아내를 생각하며 '王侯의 밥, 乞人의 찬'이란 쪽지를 남긴다. 남편의 마음이 담긴 쪽지를 보고 아내는 왕후가 된 것보다 더 가슴 뿌듯한 행복감에 눈물이 핑 돈다.


두 번째 일화는 어느 가난한 詩人내외의 젊은 시절 이야기이다. 쌀이 떨어진 어느 날 아침 시인의 아내는 남편에게 삶은 고구마를 먹어보라고 권한다. 고구마를 좋아하지 않던 남편은 햇고구마라 맛있다며 자꾸 권하던 아내의 말에 마지못해 먹으며 아침상을 들이라고 재촉한다. 그러자 아내는 방금 먹은 고구마가 아침밥이라 말한다. 그제야 쌀이 떨어진 걸 안 남편이 무안해 하자 아내는 미소 띤 얼굴로 긴 인생에 이런 일도 있어야 늙어서 이야깃거리가 되지 않겠냐고 반문한다. 남편은 이 말에 묵연해지면서도 가슴속은 밀려오는 행복감으로 충만해 옴을 느낀다.


세 번째 일화는 남편을 여의고 홀로 자식을 키운 여인에게 큰 힘이 되어준 죽은 남편의 따뜻한 손길에 대한 회고담이다. 광복직후 사업에 실패한 여자의 남편은 사과장사를 시작한다. 그러던 어느 날 춘천으로 장사를 떠난 남편이 사흘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자 아내는 남편을 찾으러 춘천으로 떠난다. 춘천에 도착한 아내는 천신만고 끝에 남편과 만나고 그간 피치 못할 사정을 전해 듣는다. 서울로 돌아오던 기차 안에서 남편은 아내의 손을 쥔 채 3시간을 놓지 않는다. 아내는 그때의 따뜻하던 손길에서 힘을 얻어 먼저 세상을 떠난 남편 대신 자녀를 키울 수 있었다고 한다.


수필 '가난한 날의 행복'에 등장하는 일화들은 1964년생인 나의 부모세대의 이야기인 걸로 보인다. 그 시절은 다들 삶이 여유롭지 못할 때여서 그런지 가난이란 게 큰 凶이 되거나 요즘처럼 이혼 사유가 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당시에는 자가용이 무척 귀해 승용차가 있을 정도면 큰 부자란 소리를 듣던 때였고 찌는 여름날에도 에어컨이 아닌 부채 혹은 시원하지도 않은 바람이 나오는 선풍기로 지내던 때였다. 또한 해외여행은 일반인들은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이러한 사실을 대한민국이 선진국일 때 태어난 우리 자녀들은 잘 이해하지 못하리라 생각된다.


내가 어린 시절인 1970년대엔 크고 작은 공장들이 여기저기서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가동되었고 그 안에는 시골에서 올라온 속칭 공순이들이 三三五五로 열악한 환경에서 저임금을 받으며 노동을 하여 매달 탄 월급을 시골의 가족들에게 보내기까지 하였다. 각 가정에는 속칭 식순이들이 부엌켠에 있는 쪽방에서 생활하며 가사를 보조했다. 이렇듯 당시에는 다들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쳤고 이러한 노력 속에서 국가경제는 도약의 나래를 펴기 시작했다.


그러한 과정을 거쳐 대한민국은 비교적 짧은 기간에 선진국으로 부상하며 생활수준이 그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향상되었다. 현재는 자가용이 없는 집이 없고 여름에도 시원한 방에서 무더위를 피할 수 있게 되었으며 겨울에도 따뜻한 환경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경제성장에도 행복은커녕 자살률이 OECD 국가 중 최고이며 이혼율 또한 높은 게 대한민국이다. 가난한 날에도 불평하거나 처지를 한탄하지 않고 마음속 깊이 정을 서로 나눌 수 있었건만 한층 부유해진 지금 오히려 비참한 삶을 산다는 사실은 우리를 무척 슬프게 한다. 잘 살자고 허리끈을 조으고 새벽밥을 먹고 주말이나 휴일도 없이 일했건만 결과는 異婚에 自殺에 공허함이라면 왜 사는지에 대한 진지한 苦悶의 부족과 자기밖에 모르는 俗物근성 때문은 아닌지 반성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인간에게는 물질적인 만족도 중요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정신적인 만족이 필요하다. 만일 자격증이나 학위 등 경쟁력을 갖추고 살면서도 하는 일에 대한 의미나 보람을 갖지 못한 채 돈을 벌어 고급 승용차를 몰고 호화주택에 산다고 한들 이는 그림의 떡이요 보여주기 위한 치장에 불과할지 모른다. 또한 기본생활이 안정된다면 지인들과 교류를 통해 즐거움도 나누고 사회적인 존경도 받을 수 있어야 하건만 돈벌이나 하며 외톨이 삶을 산다면 허무함만이 남을 뿐이다.


현재와 같은 세상에서 '가난한 날의 행복'은 저 먼 나라의 이야기처럼 느껴질지 모른다. 하지만 그 마음을 늘 가슴속에 간직하고서 살 수 있다면 갈수록 삭막해지는 삶 속에서나마 살아있는 훈훈한 인간의 숨소리를 듣게 되리라 생각한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돈 아닌 自由를 통한 幸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