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봉기 Jul 08. 2024

인간은 催眠속에 살고 있는 건 아닐까?

'催眠術 (hypnotism)'이란 암시에 의해 인위적으로 잠에 가까운 상태로 이끌어 내는 기법을 말한다. 나는 실제로 최면을 거는 사람과 최면에 걸려 주문대로 마치 로봇처럼 행동하는 사람들을 직접 목격한 적이 있다. 이런 모습은 어찌 보면 洗腦와도 일맥상통한다는 생각이 든다. 1970~80년 당시 북한 주민들은 "김일성 수령님 덕분에 지상의 낙원인 북조선에서 최고의 행복을 누리고 있다"라고 힘차게 말하는 화면을 접하곤 했다. 끼니도 잘 해결하지 못하고 피골이 상접한 이들 입에서 어찌 그런 말이 나온 건지 지금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런 식의 인간 길들이기는 권력자들이 무척 즐기는 통치방법일지 모른다. 적어놓은 내용을 계속 암송하게 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신봉자가 됨을 새삼 학인하게 된다. 이런 부정적인 최면 건너편에 긍정적인 최면도 있음을 알게 된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로 시작해 "민족의 슬기를 모아 줄기찬 노력으로 새 역사를 창조하자"로 끝나는 국민교육헌장이 그러하다. 일부 진보인사들은 자신은 인간적으로 살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난 것이지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태어나지 않았다고 강하게 항변하기도 한다. 나름 일리 있는 얘기이긴 하다. 하지만 국민교육헌장을 통치자가 국민들을 자기 마음대로 주무르기 위해 제정했다는 식의 주장은 지나치지 않나 싶다. 민족이 중흥해서 자기에게 해가 될 게 뭐가 있는가? 또한 슬기를 모아 새 역사를 창조해서 나쁠게 또 무엇인가?


정치와 유사한 최면으로 종교를 들 수 있을지 모른다.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하시어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 살게 하셨는데 사탄의 꼬임에 빠져 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를 먹고 인간은 낙원에서 추방되었다. 그리하여 罪人이 된 인간을 어여삐 여겨 하느님이 구세주 예수를 세상에 보내어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심으로써 인간의 罪는 사함을 받게 되었다. 따라서 주일날 교회에 나가 예배를 하고 하느님께 기도하면 인간은 구원을 받아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성서의 내용은 주일마다 세상의 모든 교회에서 성직자들의 입을 통해 동시다발적으로 전파되기에 전 세계의 모든 크리스천들은 고개를 숙이고 성서말씀이라고 하면 세상 모든 것 위에 군림하는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한다.


요컨대 누구도 이러한 聖스러운 내용에 대해 이견을 제기하지 못한다. 성직자들은 신비로운 말씀은 인간의 머리로 이해하려 해서 되는 게 아니라 전적으로 믿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따라서 교회에서는 기도에 전념할 뿐 성서의 권위에 대한  사소한 도전도 불경스럽게 여겨진다. 이런 식의 신앙은 최면 내지 세뇌라는 지적으로부터 자유롭기 어려울 것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자신의 삶을 신앙의 틀속에 가두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하느님은 나란 존재를 늘 지켜주기에 내가 하는 모든 일은 거침이 없고 난관이 닥치면 하느님이 언제나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주신다"는 문구를 벽에 붙여놓고 생활한다. 또한 눈을 감고 하루에도 여러 번 그러한 내용의 기도를 통해 자신의 삶을 신앙적으로 이끌어간다. 이러한 태도도 신앙을 통한 '자기 최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삶은 한마디로 혼란의 연속이다. 누구나 할 것 없이 주변에는 늘 자신의 권위를 위협하는 것들이 시시각각 출현하기에 이러한 것들에 맞서는 강력한 무기로 등장한 것이 자기 최면일지 모른다. TV드라마에서도 자기 최면을 담은 대사가 나온다. '태조왕건'에서 궁예란 인물은 "나는 세상을 구하러 온 미륵이오"라고 자신을 내세우며 '야인시대'에서 김두한은 "나의 아버지는 독립군 총사령관이신 김좌진 장군이십니다"라고 하며 자신이 보통인물이 아님을 과시한다.



작가의 이전글 인간이 가장 평화로운 때는 언제일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