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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봉기 Jul 14. 2024

솔개처럼 살 수 있다면?

"우리는 말 안 하고 살 수가 없나 날으는 솔개처럼 倦怠속에 내뱉어진 소음 위로 주위는 가득 차고"로 시작되어 "수많은 관계와 관계 속에 잃어버린 나의 얼굴아, 수많은 농담과 한숨 속에 멀어져 간 나의 솔개여"로 끝나는 '솔개'라는 노래를 듣고 있으면 個性을 잃고 산업화 속에서 劃一化되는 현대인의 서글픈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현대인은 자신만의 고유한 빛깔과 향기를 가진 완성체라기보다 현실 속에서 자그마한 부속품으로 전락해 삶의 주인이기보다 생존에 급급한 존재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삶이란 말 生存이란 과는 天壤之差다.


삶 혹은 인생이란 건 누구에게나 喜怒哀樂으로 연출된 휴먼드라마이다. 태어나 교육을 받고 성인이 되어 직업을 갖고 가정을 꾸리며 살다 눈을 감는 게 삶이다. 그 과정에서 괴롭거나 슬픈 일 이어진다면 삶이 地獄겠지만 그 후 薰風이 불면 지나간 고통의 시간은 마치 현재 기쁨의 의미를 배가시켜주기 위했던 것인 양 잔잔한 미소를 짓게 한다. 지난날의 땀과 거친 숨소리는 마치 오크통속에서 熟成되는 와인의 그윽한 향기와도 같이 삶을 한층 품격 있게 해 준다. 만일 살면서 꽃길만 걷는다면 삶은 별 吟味할 가치도 없는 애들 소꿉장난일지 모른다.


이러한 삶의 基低에 의식주란 말로 대변되는 生存이란 게 있다. 생존이란 삶을 떠받치는 礎石이다. 衣食住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때 인간은 개성이나 철학을 감히 꿈꾸기 힘든 신세가 된다. 따라서 인간이라면 누구나 생존문제의 해결에 깊은 감사를 표해야 하지만 인간이 생존에만 급급한 삶을 산다면 이 또한 비참한 일이다. 전후세대인 우리와 달리 우리 윗세대들은 전쟁과 그 이전 일제 강점기를 겪으며 우리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험난한 삶을 살아왔기에 생존 자체가 곧 삶이란 등식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나도 이제 기성세대가 되어 우리 아래 세대들을 제대로 이해하기는 어렵다. 우리 윗세대들도 우리가 현실을 벗어난 이상적인 얘기를 할 때 못마땅 반응을 보이곤 하였다.


생존의 틀에만 갇혀 지낸다면 '솔개'란 노래 속에 담긴 '正體性의 상실'과 '劃一化'와 같은 문제들은 배부른 얘기일 수도 있다. 먹고살면 됐지 개성이나 정체성과 같은 건 어찌 보면 부자나라에나 는 사치스러운 얘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생존이 위협을 받는 상황에서도 沒個性化를 벗어나려 하는 노력은 존중되어야 할 것이다. 이는 민주화가 선진국들만의 專有物만은 아닌 것과도 같은 이치이다.


이와 더불어 생존이란 話頭속에서 덮인 正義나 人權과 같은 문제도 재조명되어야 하리라 보인다. 분단이 고착된 나라에서 전쟁위협에 시달리면서도 힘 있고 돈 있는 이들은 갖은 수단을 써서 골치 아픈 병역문제를 교묘하게 피하거나 군에서도 편한 보직을 맡는 '신의 아들' 혹은 '사람의 아들'로 사는 반면 힘없고 돈 없는 이들은 '어둠의 자식들'로 살고 있다.


'솔개'란 노래의 가사처럼 복잡하게 얽힌 관계 속에서 잃어버린 저마다의 얼굴이 하나씩 본래의 빛깔과 향기를 찾는 세상이 된다면 힘없는 이들까지 무력함이란 굴레에서 해방되는 세상도 리라는 희망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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