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봉기 Sep 01. 2024

세상에 不滿이 사라질 날이 있을까?

살면서 기쁨이 충만하여 주변을 잔잔한 미소로 어루만져주는 이들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스스로 먹고사는 문제정도는 해결이 되어 그러하다고 해도 예사롭지 않건만 혹 기본생활도 보장되지 않은 이가 그러하다면 '현대판 聖賢'이라 불릴 자격이 있을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세상에는 기쁨보다 불만으로 가득 찬 이들이 더 많다. 불만은 인간의 삶과 늘 함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인데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동시에 가지는 걸로 보인다. 不滿이 가득 찬 이들은 늘 못마땅해하기에 함께 하기가 때로는 불편하다. 하지만 모든 일에 긍정적이거나 순종적이기만 하다면 늘 그 자리에 머물 수도 있다.


속 깊은 '불만'과 신경질적인 '짜증'은 약간 차이가 있다. 짜증은 못마땅해 신경질을 부리는 일시적인 현상이라면 불만은 근본적인 원인을 놓고 저항적인 태도를 가지는 걸로도 보인다. 가령 생활이 빡빡해지거나 날씨가 무더워지면 짜증을 부리게 되지만 상황이 나아지면 짜증도 줄어들게 마련이다. 반면 不滿은 근본적인 변화 내지 개선의지를 담고 있기에 생활에 여유가 없는 것도 경제운용 관련 실책이나 사회구조의 문제 등의 차원에서 접근할 수 있다.


인간은 배울수록 또한 지식이 축적될수록 순종적이기보다 불만적이기 쉽다. 현재의 삶과 정치 그리고 종교까지도 겉으로 드러난 허상이 아닌 실상을 살펴보면 불만투성이일 수 있다. 이러한 불만이 몰고 오는 먹구름이 걷히고 화창해질 날이 과연 올진 모르지만 현재의 불만과 관련한 문제는 과거와의 비교를 통해 그 의미를 재조명 내지 진정시킬 수 있을지 모른다. 과거 헐벗고 굶주린 생활을 탈피해 현재와 같은 안락한 삶을 누리는 걸 나와 같은 이들은 행복이라 느끼지만 우리 자녀들은 그렇지 않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어린 시절 선풍기나 부채로 보내던 혹서기의 찜통 같은 생활을 선명하게 기억하는 입장에서 에어컨 바람으로 시원한 방에서 보내는 지금은 마치 꿈결 같기만 한데 태어나면서 그런 생활을 했다면 얘기가 다를 수 있다.


인간으로 하여금 '짜증' 아닌 '不滿'을 갖게 하는 것이라면 과연 어떤 게 있을까? '부의 편재', '정치적 포퓰리즘', '이기주의의 확대' 및 '전쟁위협' 등을 들 수 있다. 내가 20대 때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집에 들어갔을 때 검소하기로 소문난 부친은 내가 浪費癖이 있다는 얘길 하셨다. 그때 나는 짜증을 내며 버릇없이 굴기도 했다. 또한 대학시절 학교 앞 가게 주인에게 民主化의 의미를 힘주어 말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그는 "집도 없어 셋방살이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인데 데모해서 뭐가 되느냐?"라고 했다. 그때 나는 "대한민국도 4.19와 같은 과정을 통해 민주적인 발전해 온 것 아닌가요? 그런 식으로 민주적인 발전을 무시하면 안 되는 것 아니냐?"라고 하자 "4.19도 몇몇이 어샤어샤 하며 일이 커진 거지 별 의미를 둘 일도 아니다"라고 응수했다. 당시 나는 그런 식의 독단적이고 이기적인 태도가 무척 불만스러웠다. 결국 대한민국은 비록 자기 집도 없지만 불의에 저항한 서민들의 땀과 피가 모여 군정을 종식시키며 민주화를 이루었다고 지금도 굳게 믿고 있다.


현재 나로 하여금 불만을 갖게 하는 게 있다면 무엇보다 '정치적 포퓰리즘'이다. 조선시대보다 더한 黨派싸움과 진정한 進步와 保守도 아닌 극단적인 대립이 연일 펼쳐진다. 과연 어떤 게 맞는 것일까? 나의 입장에서는 과거에서 해답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헐벗고 굶주리던 시절에는 서로 싸울 시간도 아깝기에 우선 먹고 살 생각을 하며 일해 왔다. 그런 식으로 해서 굶주림을 벗어난 현재라면 消耗的인 논쟁에 시간을 보내기보다 生産的인 일에 다시금 힘을 모아야 하리라 보인다.



작가의 이전글 힘든 登山을 왜 일부러 하는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