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들 간에 이루어지는 일은 대개 서로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한다. 이러한 신뢰는 그저 생기는 건 아니다. 누군가와 함께 지내거나 일을 하면서 믿을만하다는 느낌 내지 확신이 생길 때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그런 정도가 되면 혹 상대가 어려운 일을 당하거나 혹은 본의 아니게 실수를 해서 피해를 주더라도 오히려 도움을 주려하거나 이해해 줄 마음도 생긴다. 하지만 평소에 미덥지 못한 경우라면 그리되기 어려울 것이다.
평소에 하는 걸로 봐서 신뢰할만하다고 생각해서 믿고 돈을 빌려주었는데 상대 뒤통수를 치는 이들이 간혹 있다. 첫 번째 경우는 처음 한두 번은 믿음이 가게 처신을 한 후 믿을만하다고 생각해서 돈을 빌려주면 이때다 하고 잠적해 버리는 경우이다. 두 번째 경우는 시간이 지나서 행방을 알게 되어 빌려간 돈을 달라고 하면 차용증이나 계좌이체 등 증거가 없을 경우 돈 빌린 일 자체가 없다고 잡아뗀다. 셋째는 "잘 되었으면 몇 배로 돌려주려 했지만 그렇지 못해 돌려줄 게 없다"라고 뻔뻔스럽게도 나오기도 한다.
아는 이와 돈거래를 해서 받지 못하면 돈은 당연히 잃지만 사람까지 잃는다고도 한다. 따라서 돈거래는 하지 않는 게 맞는다고 한다. 만일 친구가 정말 사정이 딱해 찾아올 경우 특히 과거에 도움까지 받았다면 빌려달라는 금액의 절반 정도를 그냥 손에 쥐어주면서 "사정이 나아지면 갚되 너무 무리하지 마"라고 말해 버린다면 돈을 갚을지 어떨지 조마해하거나 돈 잃고 사람까지 잃는 것보다는 나을지 모른다.
나 자신을 포함해 주변에서는 누군가에게 돈을 빌려줬다가 못 받게 된 경우가 더러 있다. 아는 사이라고 불쑥 찾아와 돈을 빌려달라고 하는 이들 중에는 돈을 갚지 않는 경우가 꽤 많다. 만일 갚을 의지가 있는 이라면 현금화할 수 있는 물건이라도 가져와 맡기고 차용증서를 쓸 생각을 할 것이다. 나는 일전에 친구모임에서 농담으로 "집사람 몰래 비자금 몇천을 모아놓았다"라고 하자 한 명도 빼놓지 않고 돈 좀 빌려달라는 전화가 왔다. 그중 한 친구는 여러 친구로부터 돈을 끌어모아 본인 회사에서 하는 수익사업에 함께 투자해 고수익을 내어 돌려준다고 했는데 그만 회사 감사에 걸려 본인은 퇴사처리되고 투자한 돈은 어디론가로 사라지게 되었다.
채무를 갚지 않은 이들 가운데에는 상습적인 경우도 있다. 대학 때 나에게 와서 등록금 납부기일인데 며칠 후 집에서 돈이 올라오니 바로 돌려주겠다고 한 친구가 있었다. 돈거래 관련 경험이 전무했던 나는 순진하게도 그 말을 믿고 선뜻 돈을 빌려줬는데 그가 한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그는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비슷한 거짓말을 하며 받게 된 돈을 유흥비로 쓰고 다녔다. 도둑질도 하면 는다고 한 번은 친구가 없는 집에 들러 친구 어머니에게 급한 일로 돈이 필요하니 며칠 후 돌려 드리겠다고 하고 빌린 돈까지 탕진해 버렸다. 바늘도둑이 소도둑 된다고 그는 그런 못된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직장에서도 여럿에게 돈을 꾸어 잠적했다는 소문이 들리더니 급기야는 학원사업을 한다고 여러 사람들에게 수억을 빌려 사업을 하다 말아먹고는 이번에는 해외로 도망갔다는 소문까지 있다. 그 친구는 원래는 꽤 사는 집의 막내였다고 하는데 부친의 사업이 부도가 나자 형네 집에서 학교를 다니다 보니 용돈이 부족하여 그런 짓을 하고 다닌 모양이다. 결국 그는 신용이 생명인 사회에서 스스로 무덤을 파버린 꼴이 되었는데 그 후에도 인생의 바닥을 벗어나지 못한 걸로 보인다.
이런 식으로 속과 겉이 다른 이들이 많다 보니 사람을 믿지 못해 의심부터 하는 세상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기를 치는 이가 먼저일까 아니면 사기를 당하는 이가 먼저 일까? 사기를 당하지 않으면 사기를 칠 수 없긴 하다. 그렇기에 누군가가 자신에게 뭔가를 부탁한다면 그 진실성을 제대로 판단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건 끝없이 의심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을 것이다. 처녀가 애를 가져도 이유는 있다고 남을 속이는 이들은 그들 나름은 이유가 있을지 모른다. 모두가 그런 생각만 머리에서 지울 수만 있다면 최소한 남을 의심부터 해야 하는 일은 사라질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