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편에서 프로야구에 관한 내용을 다룬 적이 있지만 초창기 프로야구가 태동하던 1982년을 회고해 보면 현재로부터 40년 전이고 내가 대학에 갓 입학했을 때로 10대 후반의 나이였다. 아마추어 야구만 봐왔던 나여서 프로란 말 자체가 생소했고 과연 프로와 아마추어와의 차이가 뭔지 궁금하기만 했지만 당시 이미 일본과 미국에서 프로를 경험했던 선수들이 있었다. MBC 청룡의 백인천과 OB 베어스의 박철순. 다음 해가 되자 몇 명이 늘었다. 삼미 슈퍼스타스의 장명부, 해태 타이거스의 김무종과 주동식 등. 프로를 경험했던 선수들은 기량도 기량이지만 프로 자체에 대한 이해가 달랐던 것 같다. 너구리 장명부는 국내의 아마추어 티를 못 벗어난 국가대표급 선수들을 가지고 놀다시피 했다. 국내 최고의 타자 장효조도 장명부 앞에서는 계속 무안타 행진이었다.
프로야구는 지역별로 팀을 구성하였기 때문에 개막전에 팀별 신경전이 장난이 아니었다. 특히 영호남의 같은 제과업종 라이벌 해태와 롯데는 더욱 심했다. 해태 감독 김동엽에게 라이벌팀 롯데에 대해 묻자 아마추어 롯데 감독이었던 그로서는 어깨에 힘을 잔뜩 주며 "롯데 자이언츠의 감독으로 누가 선임될지 생각해 봤는데 박영길 씨가 되리라 예상했네요. 박영길 감독이라면 우리 팀의 구성으로 보면 코칭 스탶 정도에 해당되는 사람이죠...". 그다음은 롯데 박영길 감독 차례. "김동엽 감독님은 빨간 장갑을 끼고 관중을 몰고 다니시는 분이신데 저의 팀의 구성으로 본다면 응원단장을 맡으시면 잘하실 것 같습니다." 시즌이 시작되자 두 팀 모두 삼성이나 MBC와 달리 선수가 몇 명 되지도 않고 선수층도 얇아 계속 꼴찌 주변을 맴돌았다. 그러다 다음 해 83년에 해태가, 84년에 롯데가 우승하였다.
개막전이 지금은 없어진 동대문구장에서 삼성 : MBC 청룡 간 경기로 벌어졌는데 두 팀 모두 스타플레이어가 제일 많은 팀이었기에 흥행 목적으로 맞붙게 했다고 한다. 시종일관 삼성이 우세하다가 역전 홈런을 친 MBC 청룡의 승리로 끝났다. 원년도의 우승팀 OB 베어스는 시즌 전에 꼴찌 전력으로 평가받았지만 전원이 똘똘 뭉쳐 박철순의 22 연속승에 힘입어 우승을 거머쥐었다.
프로야구를 출범시킨 것은 떳떳하지 못하게 권력을 쥔 전두환이 민심을 돌리기 위한 목적이었다고 한다. 이에 호남은 해태 타이거스의 경기에 모든 시민들의 관심이 집중되며 83년도 한국시리즈에서 해태 우승이 확정되자 그라운드 응원석에서는 서로 어깨동무를 하며 '목포의 눈물'을 불렀다고 한다. 85년에 선동열이 입단하자 광주 팬들은 광주에서 버스를 대절하여 선동열 등판 잠실경기를 관람하러 오기도 했다. 해태는 86~89년 연속 우승도 하며 천하무적의 팀이 되었다.
지금은 사라진 동대문 경기장에 몇 번 가서 야구 관람을 한 적이 있었는데 프로야구 경기로는 1984년 가을 롯데 : OB 경기였는데 롯데는 최동원이 선발로 나와 이긴 후 자신이 준비해온 야구공을 관중석을 향해 던져주었다. 동대문구장은 잠실구장보단 작았지만 아담하기도 하고 야구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있는 곳이건만 인젠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 이유가 야구인들 중에서는 정치적인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 없었기에 그랬지 않나 싶다.
지금까지 프로가 처음 시작될 때의 이런저런 모습을 스케치해 보았다. 지금과 비교해 보면 제대로 된 프로도 아니고 실업야구의 연장 정도에 불과했다는 생각이 들지만 전 국민의 관심이 집중되어 아직껏 40년간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게 신기하기도 하다. 과거 70년대만 해도 운동을 했던 사람들은 다들 찢어지게 가난한 생활을 하였다. 하지만 프로화와 함께 올림픽에서 국위를 선양했던 선수들에게 연금 등을 제공하며 안정적인 생활을 하게 해 준 것은 크게 달라진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