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9월 11일 불세출 영웅 최동원은 별세하여 10주기 기념으로 최근 나온 영화 '1984 최동원'을 대선후보 이재명 포함, 허구연, 김응용, 이만수, 이순철 등 야구인들이 관람하였다. 나는 아직 영화는 보지 못했지만 유튜브의 '철완 최동원 시대와 승부하다'를 통해 과거 고인과 꽤 친했던 5명의 지인 김시진, 김용철, 양상문, 한문연과 허구연이 기억하는 최동원의 생전 모습을 다시금 떠올릴 수 있었다.
얼마 전 최동원의 84년 한 해 탈삼진 기록 223개가 225개를 기록한 두산 베어스의 미란다에 의해 깨어졌지만 앞으로도 84년 한국시리즈에서 세운 4승의 기록은 깨지기가 힘들 거라고 한다. 당시 대학교 3학년이던 나는 그가 등판하여 패했던 5차전을 잠실야구장에서 직접 보았는데 그 경기를 잊을 수 없다. 당시 호투하다 상대팀 삼성 라이언스의 대타 정현발에게 투런 홈런을 맞고 패전투수가 되었다. 그때 나는 시리즈 전적 2대 2에서 롯데는 에이스가 나온 경기를 패했으니 시리즈가 삼성으로 넘어가는구나 생각하였는데 결국 7차전까지 갔고 결국 극적으로 우승까지 하게 되었다.
나는 1976년 중1 때부터 야구를 보기 시작했는데 당시 최동원은 경남고 3학년으로 봉황대기를 우승했지만 화랑대기에서는 경남상고에 1:0으로 지며 준우승했다. 최동원이 연세대 시절 가장 어렵게 시합을 했던 학교가 동아대. 그 이유는 동아대 선수들은 어릴 때부터 최동원의 볼에 익숙했기 때문이었다.
최동원이 연세대 축제 때 파트너로 데려간 사람이 당시 인기 최정상이던 탤런트 장미희였다. 최동원은 대학 1학년 때부터 명실상부한 국가대표 에이스였다. 그는 공도 국내에서 가장 빨랐지만 칼과도 같은 제구력을 겸비했기에 가능했다. 그 이유가 시합에서 200개 정도의 공을 던졌다면 집에서 그만큼의 연습구를 던졌을 정도로 지독한 노력을 했기에 그러했다. 선동열 말에 의하면 자신은 시합 전 연습구를 30개 정도 던졌던 반면 최동원은 70개는 던져야 몸이 풀렸다고 했다. 비록 타고난 강견이지만 그런 투구 습관은 암만해도 어깨에 무리를 가져오며 그로 인해 선수생활도 단축되었을 거라는 것이다.
선동렬과 맞붙은 1987년 경기에서 15회까지 200개 이상 투구를 한 후에도 최동원은 3일 쉬고 나와 완투승을 거둔 반면 선동열은 며칠 더 쉬고 나와서도 1회 던지고 교체되었다. 두 선수를 비교할 때 공 구위는 선, 완투 능력은 최가 앞섰다고 한다. 한국시리즈에서 혼자 4승을 거둔 것도 완투능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1984년 삼성이 한국시리즈 상대로 OB 베어스 대신 롯데 자이언츠를 택한 이유가 정규시즌엔 삼성이 롯데만 만나면 펄펄 날았기 때문이었는데 한 가지 간과한 것은 정규시즌과 달리 단기전에 빛을 발할 최동원의 완투능력이었다.
대한민국을 대표했던 두 투수가 최동원과 선동열이라 하지만 이미 고인이 된 지 10년이나 된 최동원이 이리 주목을 받는 이유는 그의 선수 시절 화려했던 경력도 있지만 그가 보여준 한 인간으로서의 꿋꿋했던 모습이라 생각된다. 그는 당시 갑이던 구단에 맞서 일방적이던 연봉협상 등 프로선수의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선수협을 결성하였다. 특히 2군 선수들은 고기조차 사 먹기 힘들 정도의 생활을 했던 걸 알고서 거의 혼자 총대를 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솔직히 말해서 그때 최동원이 다른 것 신경 쓰지 않고 야구만 했다면 아무 걱정 없이 호강하며 살 수 있었지만 그는 꽃길을 걷어차고 스스로 가시밭길을 택하였다. 결국 그의 고귀한 희생에 힘입어 현재 프로야구 선수들은 거액의 연봉에 FA 계약을 통해 100억씩 주머니에 넣을 수 있게 되었다. 한때 선수협 활동을 한 바 있던 마해영은 TV에서 "요즈음 선수들 최동원 선배님께 정말 감사해야 합니다"라는 말을 하였다. 솔직히 프로야구를 통해 거액을 손에 쥔 선수 중 그리 되도록 십자가를 졌던 선배 최동원의 숭고했던 마음을 한 번이라도 언급한 인간을 본 적은 한 번도 없다.
마지막으로 유튜브에서 지인들이 했던 말 중에서 기억나는 것을 적어 본다.
김시진 :
동원이랑은 대학교 1학년 때부터 국가대표 생활을 하며 정말 가깝게 지냈는데 내가 신촌으로 가거나 동원이가 행당동 쪽으로 와 자주 만나면서 무척 친했고 제가 발로 엉덩이를 차기도 한 사인데 무슨 이유로 이리도 빨리 세상을 떠나게 됐는지 무척 아쉽습니다.
김용철 :
선수협은 나나 동원이가 얘길 꺼내서 망정이지 다른 선수였다면 바로 잘립니다. 87년 선동열이랑 맞붙을 때 처음엔 우리가 이기고 있어서 편하게 했는데 동점이 된 이후부터 한점 주면 끝나는 상황이라 분위기가 살벌했어요. 야인 시절 연락도 하면서 지냈는데 과거 함께 선수생활을 했던 사람들이 다시 같은 팀에서 코칭 스탭을 하면서 야구를 한다면 좋았을 거란 얘기도 했습니다.
양상문 : 동원이 형은 제가 같이 경쟁할 정도의 상대가 아니었지만 고1 때 붙어 이긴 적이 있었고 정기 고연전 때도 4:1로 이겼어요. 동원이 형은 롯데에 같이 있을 때 형 아버지가 일본 프로야구 전문 잡지 번역한 걸 가져와서 일본 프로야구의 당시 트렌드를 알려 주시곤 했는데 선수 시절 도움이 참 많이 되었습니다. 동원이 형은 야구 외에 다른 것도 즐기며 지냈는데 TV에 출연, '내가'를 부르기도 했어요. 가수 정도 실력은 아니었네요. ㅎㅎ
한문연 :
형님은 볼이 정말 빨랐고 어떤 타자랑 붙어도 물러나는 일 없이 정면승부를 했어요. 선수 시절 차를 몰게 됐는데 기어 차 말고 오토를 사라고 했어요. 기어에 손을 올리면 떨림이 있어 어깨에 별로 안 좋다고 그랬네요. 그 정도로 자기 관리에 철저했던 사람입니다.
허구연 :
최동원은 자신이 부산을 대표했던 선수라는데 대한 긍지가 대단했어요. 만일 최동원이 국내 메이저리그 입성 1호로 토론토 블루제이에 갔다면 정밀 진단 등 관리를 받기 때문에 일찍 세상을 떠나지 않았을 수도 있어요. 지금도 블루제이팀 관계자를 만나 얘기를 하면 그 정도 체격에 그 정도 속구로 야구를 그만큼 잘하는 투수는 없다고 해요.
지금까지 고인이 된 지 벌써 10년이 된 최동원에 관한 기억을 떠올려 보았다. 최동원은 야구만 하는 일반 선수들과 달리 '영원한 야구인'이란 타이틀을 붙여도 손색이 없다. 자신이 확신하는 것이라면 야구든 인생이든 한치의 주저함이 없었기에 더욱 빛났지만 한편으로는 그림자도 그만큼 길고 무거웠던 인물이었다.
아쉬운 얘기겠지만 최동원을 삼성으로 트레이드시킬 때 왜 운동장에서 농성하는 팬들이 없었을까? 아니면 롯데 경기를 보이콧이라도 하는 팬들이 왜 없었을까? 지금 같으면 SNS 등을 통해 누군가 총대를 메고 선동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만일 내가 공상소설을 하나 쓴다면 누군가가 야구 전문회사를 하나 세워 롯데와 같은 저질 구단과는 확연히 차별화되는 프로야구 구단을 만들어 운영해서 크게 성공하는 스토리를 다뤄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