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사양화되어 가는 스포츠가 얻어맞는 스포츠인 복싱이다. 하지만 70년대 당시 복싱의 인기는 한마디로 대단했다. 일요일 저녁 MBC '챔피언 스카웃'이란 프로그램에서는 국내 및 해외 주요 복싱 경기들을 보여 주었다. 당시 경량급은 멕시코와 푸에르토리코가, 중량급에서는 미국이 세계타이틀을 휩쓸었다. 당시 국내의 경우 시골에서 상경하여 신인왕, 한국 챔피언, 동양챔피언을 거쳐 세계 타이틀에 도전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중 챔피언이 되는 경우는 극히 일부였다. 새벽 찻길에서 모자까지 달린 운동복을 입고 로드웍을 하며 찬 공기를 가르던 무명 복서들의 모습도 눈에 선하다. 인기 팝송 중에는 사이먼과 가펑클의 'The Boxer' (1969년)란 곡도 있었는데 죽은 복서를 추모하기 위해 나온 곡이라고 한다.
프로복싱 세계 타이틀전이 벌어지는 날이면 신문의 스포츠면에 챔피언과 도전자의 키, 체중, 리치, 주 무기 등이 비교표로 나왔고 시합 당일이 되면 오전부터 일이 손에 잘 잡히지 않기도 하였다. 여러 시합이 있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시합이 몇 개 있다. 1975년 일본에서 벌어진 류제두, 와지마 고이찌전 그리고 1979년 박찬희, 에스 파다스 전이다.
류제두는 동양챔피언까지 올랐는데 도일하여 당시 5차 방어전까지 성공했던 일본 영웅 와지마 고이찌에게 도전했다. 당시에는 한일전이라면 사람들이 눈에 불을 켜고 지켜봤으며 그것도 일본 원정경기에서 승리할 경우 온 나라가 뒤집어졌다. 와지마와의 타이틀전에서 7회 KO승을 거두는데 당시 MBC에는 한번 더 그 경기를 방영해해 달라는 전화가 쇄도하여 번외로 방송을 해줄 정도였다. 그다음 일본에서 가진 1차 방어에서도 KO승을 거뒀지만 2차 방어 때 재경기를 가진 와지마전에서는 뭘 잘못 먹었는지 서서 얻어맞기만 하다 15회에 KO패. 그 경기를 볼 때의 정신적 충격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박찬희는 한마디로 천재 복서였다. 아마 전적이 127전 125승, 고1 때 국가대표 선수였으며 프로에 들어와서 '링의 대학교수'란 별명의 미구엘 칸토를 꺾고 세계타이틀을 획득, 3차 방어전에서 멕시코의 강타자 구티 에스 파다스를 상대로 툭 맞은 펀치에 다운을 당하고는 저돌적으로 들어오던 상대에게 전광석화 같은 펀치로 역전 KO를 시켰다. 1회에 다운을 당하고는 2회에 KO를 시키다 보니 당시 부산 구덕체육관에서 줄을 서있다 늦게 입장한 관중은 시합을 보지 못했던 해프닝도 있었다. 박찬희는 몸이 빠르고 상대의 펀치를 무력화시키는 복싱 테크닉이 발군이었다. 약점으로 지목된 점이 테크닉에 비해 약한 펀치와 후반 체력 저하에 특히 왼손잡이 징크스였다. 결국 6차 방어에서 일본의 왼손잡이 복서 오쿠마 쇼지에게 9회 TKO를 당했다. 5차 방어를 하고 한 달 후 가진 시합이기도 했지만 국내에서 가진 한일전에서 별로 위협적이지도 않던 상대에게 졸전을 벌이고 창피하게 패했던 점이 아직도 마음 한편에 석연치 않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이상 70년대 인기 스포츠였던 복싱과 기억에 남아 있는 세계타이틀전에 대해 스케치하였다. 과거 헝그리 스포츠였던 복싱에 국민적인 관심이 모아진 걸 보면 갑갑했던 시절 뭔가 속이 뻥 뚫리는 통쾌함을 기대하던 심리가 작용하지 않았나 싶다. 나 자신도 복싱이라면 광적이었기에 아직 머릿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는 타이틀전이 무척 많다. 만일 나더러 복싱을 하라고 했다면 링위에서 얻어맞기만 했겠지만 응원하던 복서가 링에서 얻어 맞고 내려올 때엔 분통이 터져 속이 내려앉는 듯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