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실을 박차고 험한 세상으로
정주영, 나훈아, 신성일 스토리
온실에서 자란 화초는 비바람과 눈보라를 경험하지 못하고 유약하게 자라다 보니 바깥으로 옮기면 얼마 있지 않아 시들고 말라죽어버릴지 모른다. 하지만 바위 사이를 헤집고 피어있는 소나무는 아무도 돌봐주지 않건만 오랫동안 강건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리보면 평온한 환경과 생명력은 서로 상반된 관계인 듯싶다.
스포츠에서 특히 복싱의 경우 아마추어 때 잘했던 선수가 프로에 가서도 대개 잘하지만 어느 시점에서는 프로에서 산전수전 겪은 선수의 벽을 넘지 못하고 좌절하는 경우를 본다. 내 기억으로는 박찬희, 최충일, 고생근, 나경민, 황충재 등이 그러한 경우에 해당된다. 박찬희의 경우는 한마디로 천재적인 복서로 프로로 전향해서 얼마 되지 않아 링의 대학교수란 닉네임의 '미규엘 칸토'를 꺾고 챔피언에 올라 승승장구하는 듯싶더니 왼손잡이 징크스 때문이었는지 평범한 복서였던 일본의 오꾸마 쇼지에게 그것도 홈링에서 계속 복부를 얻어 맞고 클런치만 하며 겨우 버티다 KO패. 그 후 일본에서 두 차례의 설욕전을 했건만 텃세 판정으로 패하고 나서 결국 은퇴하고 말았다.
현대의 창업자 정주영은 일찍이 강원도 통천의 집을 가출하여 서울로 와서 공사판, 쌀가게 등을 거치며 현장에서 배우며 갈고닦은 기술과 경험을 바탕으로 건설업, 조선업에 뛰어들어 발군의 경영능력을 발휘하였고 현재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몇 안 되는 경영자로 기억되게 되었다. 처음 시작은 가출한 소년이었지만 배운 것도 없이 현장에서 몸으로 터득한 경영자로서의 역량은 일류 경영학 박사를 능가했다고 한다.
연예인중에서도 부산에서 가출해 서울에 와서 맨몸으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가왕이 된 사람이 있다. 야구 해설가 허구연의 말에 의하면 그는 허 씨와 동년배로 중학교 때 허구연이 다니던 경남중에서 멀지 않은 대동중에서 투수를 했는데 후보로 뛰다 야구를 그만두고 서울로 올라갔다고 한다. 그는 자신이 재능이 있다고 생각하는 노래로 성공해 보려고 음반제작사를 찾아갔는데 처음엔 계속 밀대질만 했다고 한다. 그러다 한 작곡가에게 노래를 하게 해달라고 했는데 한번 노래해보라고 해서 했더니 자신의 곡을 주어 취입한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 대박을 쳤다. 그는 본명이 최홍기였기에 부산의 가족들은 라디오로 그 곡을 듣고 그인지 몰랐다고 한다. 그 후 빚만 있던 회사가 드디어 돈을 벌기 시작했고 그 후 취입한 음반마다 계속 히트를 치며 가출했던 촌놈이 대한민국 최고 가수로 지금까지 기억되고 있다.
몇 년 전에 타계했던 한국 영화계의 대스타 신성일도 마찬가지였다. 명문 경북고를 졸업하고 서울에 올라와서 밥도 못 먹고 밑바닥 생활을 하다 우연히 전봇대에 붙어 있던 신필름의 신인 배우 모집 광고를 보고 찾아갔는데 2,640대 1의 경쟁을 뚫고 발탁되었다. 신성일은 TV 토크쇼에서 과거에 점심을 굶고 명동을 지나갈 때 갈빗집에서 나는 냄새에 속이 뒤틀렸다고 하면서 그 후 부자가 된 후 그 갈빗집에서 한 달간 예약을 하고 점심을 먹었다고 했다. 그가 전성기던 1970년에 냈던 소득세가 359만 원으로 영화배우 중 1위었다는데 42만 원으로 가수 1위었던 이미자보다 약 10배 정도나 많은 걸로 나온다.
이상 특별한 배경도 없이 맨손으로 크게 성공한 세 사람의 스토리를 소개하였다. 이들과 달리 온실 속에서 자란 경쟁자들은 하나둘씩 사라졌건만 아직까지 대한민국 남녀노소가 그 이름 석자를 또렷하게 기억한다는 사실은 놀랍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