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되기 전, 차원이 다른 도약이 필요한 시점
※ 본 글은 영화 <어쩔 수가 없다>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내가 본 영화 〈어쩔 수가 없다〉의 엔딩은 피지컬 AI가 완벽하게 구현된 대한민국 제조업 현장이었다. 원자재 운반부터 세탁, 절단, 포장까지 제조업의 모든 공정이 완벽하게 자동화되어, 인간은 각 단계에서 검수만 수행하면 되는 스마트 팩토리. 한 사람이 공장 전체를 운영하는 시스템. 결국 주인공 만수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이 처음 당면했던 것과 같은 실업자 수백 명을 만들어냈다는 것이 가장 큰 비극이 아닐까. 박찬욱 감독 또한 이러한 아이러니를 명백하게 의도했다고 본다.
영화가 이례적으로 상영 전 포춘 500 CEO들을 초대해 스페셜 상영 이벤트를 개최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대규모 구조조정이 만연한 미국 거대 기업들을 향한 메시지였다고 생각한다. "어쩔 수가 없다"는 핑계로 AI를 통한 인력 대체의 끝없는 사이클을 지속하는 것에 대한 경고 말이다.
기업 입장에서 급변하는 사회에 적응하기 위한 필수적인 체질 개선으로 인력을 감축한다는 논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평생 생계를 책임지던 일터를 하루아침에 잃어버린 사람들, 특히 AI로 인해 일자리를 잃거나 아예 사회 진출 기회조차 박탈당한 대졸 취준생들 앞에서도 거대기업 CEO들은 당당할 수 있을까.
만약 그들 자신도 CEO를 대신할 훨씬 똑똑하고 시장의 흐름을 정확히 읽어내는 AGI 시스템으로 대체된다면 순순히 납득하고 물러날까? 아직은 그럴 리 없다고, 자신은 대체될 수 없는 회사의 필수불가결한 존재라고 생각하며 다른 이들을 정리해고하는 이들이 분명 존재한다.
이러한 오만은 최악의 시나리오를 상상하게 만든다. AI가 이세돌과 커제를 꺾었듯이 산업 현장에서 모든 인간의 노동을 대체해버리거나, 19세기 러다이트 운동처럼 노동자들의 봉기로 인해 더 큰 혼란을 초래하는 미래 말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피지컬 AI에 저항해야 하는가? 그건 아니다. 적어도 나는 대한민국의 글로벌 사회 생존을 위해 그 누구보다 발 빠르게 피지컬 AI를 선보여 세계를 선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피지컬 AI는 완벽하지는 않지만, 소용돌이치는 AI 패권 전쟁에서 우리나라가 주도권을 가져올 수 있는 몇 안 되는 핵심 카드다.
다행히도 이 기회를 놓치면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린다는 것을 정부와 기업 모두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는 것 같다. 5,000선을 바라보는 코스피와 눈부신 실적을 기록하는 한국 주식시장이 이러한 기대 심리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런 상황에서 대체된 사람들은 "대한민국을 위해서 당연히 일자리를 잃는 게 당연한 거냐"라고 반문할 수 있다. 만약 내가 〈어쩔 수가 없다〉를 보지 않았더라면, 미국에 오지 않았더라면, 내가 다니던 두 회사에서 구조조정을 코앞에서 경험하지 않았더라면, 이 또한 어쩔 수 없는 사회의 큰 흐름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하루아침에 회사에서 피바람을 목도한 비겁한 생존자로서, 나는 이 "어쩔 수가 없다"라는 0 아니면 1의 이분법적 사고방식이 현실에서는 극히 드물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회사 입장에서 가장 쉬운 선택이 구조조정이어서 그것을 택한 것이지, 충분히 다른 선택지도 존재한다.
예를 들어, 감축된 인원을 AI 기술로 인해 수요가 늘어난 새로운 직무로 업스킬링(upskilling) 하여 업무 전환을 지원하는 방법이 있다. 또는 당장의 비용 절감을 위해 전체 임금 동결이나 사내 복지 축소 같은 방식도 있다. 이러한 대안들이 당장은 구조조정보다 어렵더라도, 장기적 관점에서는 인류가 진화하듯 사회가 함께 AI로 인한 풍요의 시대로 안정적으로 접어들기 위해 꼭 필요한 사고방식의 프레임워크(framework)라고 생각한다.
나도 AI로 대체되기 싫다. 그래서 AI가 나를 대체하지 못하도록, AI를 활용하는 내가 AI로만 이루어진 시스템보다 앞서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분명 AGI 시대가 도래하면 내가 어떻게 발버둥 치든 AGI로만 구성된 완벽한 시스템이 나를 대체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미래가 결국 누구를 위한 미래인지 생각해봐야 한다.
일론 머스크가 말하듯 노동을 기계가 완벽히 대체하고 돈이 더 이상 의미가 없어진다면, 우리는 과연 어떻게 한정된 자원을 배분하고 의사결정을 이루어 나갈 것인가? 아니면 기계가 모든 인간 위에 군림하는 미래를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인간의 자유의지를 포기한 채 인간성(humanity, what it means to be a human)을 재정의해야 하는 시점일까?
현시점에서는 해답을 찾는 과정에서 더 많은 질문이 쏟아지고, 상황 또한 급변하기 때문에 지금 생각해 낸 답이 과연 1년은 버틸 수 있을지 걱정된다.
그럼에도 나는 내일 일터에 있음에 감사하며, 살아 있음에 감사하며 출근하겠지. 당장은 AI가 나를 100% 대체할 수 없음에 안도하며, 어떻게 AI를 활용하여 내 역량을 증폭하고 나 자신을 진화시킬 수 있을지 고민한다.
이 질문이 지금까지 해온 내 고민 중 가장 실용적이면서도, 동시에 AI로 인해 인류가 다음 단계로 도약하는 데 가장 중요한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괴로울 수도 있지만 정해진 해답이 없고, 해답을 만들어 나가야 하는 이 자유의지야말로 가장 인간다운 것이 아닐까.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중요한 질문에 동참하기를 바라는 마음에 이 글을 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