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간을 가기 위한 여정이란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 는 어른들 말은
인정욕구많고 눈치보기 바쁘던
10대20대 나에겐 너무 어중간하다는 말로 들렸다.
어릴 때 '적당히'라는 단어를 몰랐다.
적당히 하라는 말이
적재적소에 맞는 옷차림과 매너를 가지는 것이
거리를 얼만큼 두고 사람과의 관계를 가져가야 하는지를
그 적당한 온도와 정도를
적당히 몰라도 되던 시절을 벗어나니
그 말이 더 어렵게 느껴진다.
네이버 사전에서 중용을 치면
이 적당히 라는 개념이 더 어지럽게 깔려있는 것 같다.
쉽게 쓰여진 듯 보이나
그 성질은 전혀 이지하지 않은 단어.
나 혼자 적당하면 되는
나 혼자 먹는 밥과 차와 시공간과
남편 연인 친구 가족 직장동료와 내가 놓여진
하나의 상황 속 밥과 차와 시공간은
다르게 펼쳐지게 마련이다.
누군가와 함께 식사를 하고
차를 마시고 걸을 때에
혼자 하듯 나만 집중해서 있다면
나는 그 무리에서
정맞는 모난 돌이 될 수 있다.
반대로
혼자 있는 시간과 공간에서조차
자신의 모습으로 있지 못할만큼
타인을 의식해서 나오는 중용의 자세는
또다른 의미에서 적당하지 않은 자세가 되고 만다.
중용이 어려운 것은
상대성 때문이다.
그 상대성 역시
사람마다 상황마다 모든 조건이 다르다보니
어디에 장단을 어디까지 맞출 것인지를
내가 나를 잘 알고 있어야 가능한 일.
칠순선물로 해드린 큰아버지의 칠순파티와
2년을 꼬박 공들여서 겨우 설득한 큰엄마집 싱크대공사
학점은행제 중간고사를 직장을 다녀가며 준비하는 게
유난히 버거웠던 지난 주말
결국 몸살이 났다.
수십만원어치 사놓은 음식 중에 내가 먹은 거라고는
풀떼기들과 피자 한입 떡 한 입이 전부.
"너는, 그 묘하게 신경많이 쓸 때 탈이 나더라."
알고 있었다는 듯한 남편의 한 마디가
이상하게 위로가 된다.
나의 어중간함을
너는 알고 있구나.
어느 한 사람에게도 상처주기 싫지만
결국 그러다가 나에게 생채기를 내버린
나를 알아주는 이.
이상하게도 이 사람의 한마디가
어느 누구의 감언보다도 따뜻하게 들리는 것 조차
상대성일 것이다.
10년간 서로와 각자의 삶을 살아내고 버텨내는 너와 나
우리둘이 일궈낸 시간과 세월의 장벽이
비바람을 고요하게 막아주는 듯한
이상한 적당함.
나는 이제 이 적당함을
편안 이라고
부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