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움은 기세고, 퇴사결심은 빡세다

내 사직서가 임시저장된 이유

by 김먼지


퇴사하려고 마음먹고 출근한 월요일.

예상대로 팀장은 하나하나 금요일에 지시한 사항들을

내가 이행했는지를 보면서

업무를 더 줄 것이 없는지를 찾으며 정작 본인의 업무의 늪에서 허우적거렸다.


"이건 하셨어요?"

"이건요?"

"어 그리고 쌤 이것도 오늘까지 하셔야 되는데 하셨어요?"

"아맞다 그리고 지금 여기로 와서 이것좀 보셔야되는데."

"이게 왜 이런거에요?"

"이거 왜 이렇게 하셨어요?"

"지금 이거 보니까 잘못 하신 거 아시겠죠.?"

"선생님 업무 이해를 잘 못 하시는 것 같아서.."


이 말을 기다렸다.

이전 회사에서 똑같이 하는 수법을 그대로 읽으니

여기 팀장도 일단 팀장이라는 위계를 이용해서 급하지 않은 업무지시로 아랫사람을 찍어누르면서 업무 이해도가 떨어지고 너 멍청하구나?를 시전하면서 사람의 자신감을 떨어뜨리는 멘트를 날린다.

그러면 아 내가 미숙하구나 나를 자책하고 꼬집으며 살살살 자기 밑으로 기면서

'죄송합니다 시키는 건 다시 하겠습니다'

며 몸을 웅크리는 꼴을 보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지금 4명 세팅값 중 2명 부재로 인해 과부하된 내 업무

(자기들이 아무리 떠들어도 다른 지점 3명 일보다 우리 2명에게 떨어진 업무량이 1.5배 많음을 전체 지사 목표량과 실적조회로 매일 확인하고 알았다)가

입사 두달차 신입에게 과하다는 것을 알았으니까.

지금 내 앞에 이 팀장이

진짜 필요한 업무에 도움이 되게 신입을 교육하기보다

합리적인 이유로 업무의 당위성을 알리고 나를 이해시키지 못하고 자꾸 쓸데없는 양식 하나하를 꼬투리잡으면서

본인조차도 본연의 업무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음을 알았으니까.


게다가 본사 실장의 한마디에 일희일비하며 바빠진 자신의 스케줄을 똑바로 소화하지 못하고 있을 때

본인이 자꾸 나에게 넘긴 상담 대상자들이 알고보니 본인 담당인 것도 모른채 일거리를 넘기는 걸 봤다.

책임자가 본인임을 전산으로 다시 확인한 후

자꾸 실수하는 본인(예약시간 잘못알고 대상자에게 왜 안오냐고 전화를 건다거나 예약상담시간을 까먹거나 이미 온 대상자를 자기가 전화해놓고 그런적 없다며 나에게 상담을 넘기거나)의 행동을 본인이 봐도 어이없어하는 모습을 보다가 나는 터졌다.


"이거 내가 일일이 확인해줘야 하나요? 내가 지금 이거 말고도 업무가 굉장히 많은데 지금 선생님 자꾸 틀리는거 하나하나 확인 계속 해줘야 하나 싶어서."


음. 퇴사한 동료 물량에 계속 새로 들어오는 상담 건에 기존 참여자 정리도 안되는 상태에서 나는 인류애를 잃었다.

이 따위로 돌아가는 직업상담사 일이라면 버려도 좋다고 생각이 들었고, 나랏돈 빼먹는 데 열심히 짱구 굴려서 맨 아래 피라미드 직원들만 굴리고 쥐어짜내면 '이 갈 곳없는 바보들은 저임금으로도 얼마든지 갈아치우며 일만 하게 시키면 될거'라고 생각한 저 본사 관리자님들에게도 빅엿을 선사하고 싶었다.


'니네 없어지든 말든 내 알빠냐.'

맨날 누군가의 눈치만 보며 산 내가

그럴 필요없이 알빠노 마인드를 시전하기로 한 순간

일어나는 매직.

새벽에 본 이지영 교수님의

나를 잃어가며 지킬 건 없다는 명언의 갑옷을 입은 나였잖은가.

그리고 내 등에는 모든 나를 사랑해주는 지지자들이 많다. 여기 박차고 나가도 할 일은 널렸다.

주문을 외우니 마음이 차분해졌다.


"그게 팀장 할 일 아닌가요?"

"네? 선생님 뭐라고....?"

"팀장님도 지금 과부하 오셔서 자꾸 스케줄 틀리고 저한테 일 주시는 것도 팀장님 담당인 것 같은데요.이게 정상이라고 보시는 건 아니죠?

팀장이 팀원들 업무 잘 따라가고 있는지 확인 안해주면 누가 컨펌하는데요?이걸 저보고 알아서 하라는 게 맞으면 팀장이 왜 있어요?

이거 저한테만 중요도도 확인되지 않는 업무 주시면서 하나하나 지적하고 하실거면 지난주에 저한테 지시하신 거 얘가 제대로 했는지 안했는지 팀장 자리에 있는 분이 당연히 확인하셔야 하는 거 아닐까요?"


내가 이렇게까지 말이 술술 나올리가 없는데

이상하네.....


팀장은 그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저 안그래도 과부하 오고 아침 7시 반부터 8시안에 무조건 출근해서 하루 12시간 일하면서도 버텼어요.

아니 1월부터 팀장 뽑히지도 않은 자리에서 퇴사한 쌤이랑 둘이 일일이 리더없이도 사무실에서 일어나는 변수 머리맞대며 해보려고 애썼고요. 집에서 퇴사하라고 얼마든지 더 좋은 채용자리 알아봐주면서까지 이딴 회사 다닐 가치도 없다 그래요. 직원생각 눈곱만큼도 안하고 수당도 안주려고 야근 못하게 하면서 필요시 야근 당연하다 하고. 밥도 안주면서 사내문화라고 모여서 먹으라고 휴게시간 침범하고.

각자 개인한테 주어진 비품비 만원을 직원 상비약으로도 못쓰는데 화장지쓰는것까지 ... 이게 정상적인 회사는 아니라고 봐요 적어도 이전에 멀쩡한 회사다닌 저로서는요. 팀장님도 집까지 일 가져가서 자정까지 일하시잖아요. 이게 정상이라고 보시는 건 아닌 것 같은데. 회사에서 인사 하나 충원 못해주면서 직원보호가 안되는데 제가 왜 회사사정을 챙겨야 해요. 회사는 직원을 챙길 생각이 없는데요. 저는 할만큼 했는데도 제가 이렇게밖에 안된다고 말씀하시는거라면 이건 제 역량밖의 문제인 것 같아요.

저는 퇴사하겠습니다. 지금이라도 당장 집에 가고 싶어요."


엄한 업무 중요도 떨어지는 업무를 일부러 계속 시키려고 하는 것을 눈치챈 이상 이러다 직장내괴롭힘 대상자가 되어 회사와 싸우기에 나는 많이 지쳐있었다.


그냥 중이 절을 떠나려고 마음먹고 사직서 양식을 기안으로 올리고 있는데

팀장이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쌤. 제가 업무량 많고 과부하와서 예민하게 나온것 같아요. 그리고 그 때 위에서 요구한 거 그것도 제 생각에도 중요한 업무 아닌것같아요."

알아서 사직서 받아줄 줄 알고 좋아했는데

오늘부터 말일까지만 일하면 되니 퇴사하면 뭐할 지 친구들 만날 계획에 신난 나는 엥......

나의 망상세계가 올스톱됐다.


팀장의 인정과 사과, 그리고 일단은 충원 중이니 뽑히기 전까지는 둘이서 할수있는데로 너무 무리말고 힘내보자는 긍정적인 시그널을 (뭔가 진짜 내가 퇴사한 후의 자신을 감당할 수 없음을 직시한 듯이)확인한 후

나 역시 변수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사직서 양식은 아직도 이틀째

임시저장 중.


전날 내가 유연근무 7시까지를 초과해서 8시 퇴근한 걸 알고 있는 팀장은 화요일인 오늘은 일찍 들어가고 수요일에 업무 집중을 하라며 자신도 오늘은 일찍 들어간다는 말을 듣고


나는 입사 이래 두번째 6시 정시퇴근을 이루었다.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나오는 기쁨.

퇴근시간 지하철 붐비지만 집에 와도 7시여서 저녁을 충분히 준비할 시간이 되는 안도.

저녁먹기 전 씻고 남편과의 하루 일상을 나누며 차린 저녁상을 치우고 강아지와 함께 하는 산책의 여유.

그 여유를 누리고 난 후에도 남아있는 체력으로 남편 커피를 타주고 티비를 볼 여유도 있는 밤의 한가함.


얼마만에 누려보는 호사인가.


워라밸이 얼마나 중요한 지 다시 한번 새삼 느꼈다.


그리고 생각보다 사태파악에 빠른 인정을 한 팀장을

그대로 빅엿을 날리고 나오기에는

나도 아직 독하지 못함을 깨달았다.

한명이라도 충원되고 나면

조금 달라지겠지 하는 맘으로


이 과로의 구렁텅이에서

내 쪼대로 가보겠다는 결심을 한다.


임시저장된 사직서를 늘 고치며 부들부들 하겠지만

언제 또 용암처럼 솟아날 지 모르는 내 과부하 전제 분노를


일단 하루의 정시퇴근과 금융치료로

잠시 잠재우는 중.


내일도 새벽에 눈뜨고 바쁜 하루을 보내겠지만

어제보다 오늘이

오늘보다 내일이

더 단단해질 나를 믿고

여차하면 그냥 오늘 퇴사!그러나 할일은 충실히 내 분수에 맞게!

를 맘으로 외치며

하루를 또 준비하며 잠에 들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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