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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먼지 Aug 17. 2023

환생을 응원해

덕구의 49재가 지나간 어느날


울지 않고 멋지게 보내주는 데는 실패했다.

그래도 요란하다 못해 찬란한 견생을 덕구답게 마감한 우리집 막내를 광복절에 보내주고, 우리는 일상으로 돌아왔다.


덕구가 평소에 좋아하던 소고기들과 치킨, 꼬치꼬치 간식과 개껌들을 소화제까지 겸비해서 놓아두었다.

덕구의 49재상

"많이 먹고 가 덕구야."

"그동안 정말 고마웠어. 너무, 너무.... 사랑해."

"왈!!"

덕구를 위해 차려놓은 상에 복구가 난입할까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음식달라고 짖기는 해도 동생 상에 앞발은 올리지 않아 순조로웠던 49재.


 49재는 원래 사람이 죽은 후 49일 째 되는 날을 기려 극락으로 인도하는 천도재다. 이는 불교의 세계관에서 나왔다. 불교는 사람이 죽으면 업에 따라 윤회한다고 믿는다. 천상계 인간계 축생계 등 6도를 윤회한다는 것이다.
  개신교는 죽은 뒤 ‘하나님 나라’에 부활(復活)한다고 믿는 것과 달리 불교는 전생과 이생에서 자신이 한 행위에 따라 그 과보로 6종류의 세계 중 한 곳에 태어난다고 본다. 이를 불교에서는 고(苦)라고 여겨 이 윤회의 과정을 끊는 것을 최상의 목표로 삼는데 바로 해탈이다.
 이러한 세계관에 따라 불교는 사람이 죽으면 일주일 단위로 생전에 지은 업장을 소멸하고 ‘좋은 곳’에 태어나기를 기원하며 천도재를 연다. 이른바 초재 이재 삼재라고 하는 일주일 단위의 천도재다. 그렇게 해서 마지막 49일 째 새 몸을 받아 간다는 것이다.
 49재는 극악자와 극선자가 아닌 중간자를 위한 천도재라고도 한다. 극악자는 목숨이 끊어지는 순간 지옥으로 가고 극선자는 생전의 힘에 의해 극락에 가기 때문에 살아있는 사람들의 기도 영험이 별 영향을 못끼친다는 것이다. 반면 중간자는 다음 생이 선과 악 행업의 기억 중에서 왔다 갔다 하여 최장 49일 동안을 음계(저승)에 머무는데 이 때에 여러 깨끗한 스님들의 원력과 후손들의 바램이 한데 어우러져서 영가의 마음을 삼보께 안정시켜주면 악도에 태어나지 않는다고 한다. 만일 이 49일 동안에도 마음을 정하지 못하는 영가는 그것 자체가 영가가 머무는 곳이 되어 이른바 구천에 머물게 된다. 바로 귀신이 되는 것이다.

[출처] 불교에서 49재의 의미 |작성자 요도크


너의 다음 환생은 더 멋지겠지, 그러니 안 슬픈듯이 안녕

"덕구가 귀신이 되는 건 싫어. 우리에게 돌아오지 못해도 좋은 곳으로 가서 다른 좋은 모습으로 살면 좋겠어."


사랑하던 존재를 이승에서 완벽하게 지울 수는 없을 것이다. 존재했던 시간이 아무리 짧았어도 그는 이 세상에 왔다 간 소중한 이유를 가진 무엇이었을테니까.

우리가 만나게 된 것 또한 하늘에 감사하고 보내는 지금의 아픔 또한 니가 있어 느낄 수 있는 것이기에 하늘에 기도해본다. 가야 할 그 길이 어떨지는 모르지만 부디 잘 떠나가서, 못다한 생 다음에라도 원없이 멋지게 자유를 누리다 또 하늘의 뜻이 다할 때 미련없이 내놓고 걸어가주길.

그리고 언젠가 만날 순간이 온다면, 오랫동안 간직했던 그리움과 못다한 사랑을 그 진심들을 모두 전할 수 있길바라며 도자공원 산책을 떠나본다.

기가 막힌 하늘과 구름의 콜라보 속으로, 사랑하는 너를 보낸다

 장마가 징그럽게 덕지덕지 붙어있던 날들 가운데서도 덕구가 죽던 날은 속상하리만치 날이 좋았다.

그리고 덕구가 떠난 지 49일째 날이 저무는 저녁도, 눈이 시리도록 하늘이 사랑스러워 눈물이 핑 돌았다.

아. 우리 덕구 오늘 잘 올라가겠구나.

오늘이구나. 니가 떠나갈 날이.

하늘, 그 광활하고 인자한 품에 우리 아가 잘 품어주길

구름, 혹시 덕구가 떠나다 지칠 때면 그 살 좀 내어주고 다독거려주기를.

이제는 내 헝클어진 마음 속에서 이 신 저 신들을 다  조심히 꺼내어 빌어보기까지 한다.


갑자기 떠나는 이의 뒷모습이 시 구절이었던 기억을 더듬어 이형기 시인의 낙화를 찾아냈다.

문학 수업시간에 시험문제로나 풀어대던 그 시 구절이 오늘따라 한 줄 한 줄 가슴속을 파고 든다.


낙화
이형기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이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내 생살을 찢고 낳은 사람자식은 아니었어도

우리와 인연하여 6년이라는 시간을 살아준 강아지,

나의 삶을 완성해준 우리집 막내 덕구에게 이 시를 읽어주고 싶은 밤.

환생을 한다면 어떤 모습의 너일까 매일매일 생각해.

목줄이 없이 지붕에서 뛰어내려도 이상하지 않을 고양이의 삶도 좋겠다.

하늘을 날고 싶었을지 모르는 니가 까마귀로 환생해서 우리 위를 날아다니는 삶도 좋겠다.

짧은 생으로 마친 전생보다 조금은 더 긴 생을 받고 니가 좋아한 고양이를 마음껏 키우는 어떤 인간의 삶을 산다 해도 좋겠다.

아침은 꼭 해먹고 다닐텐데 말이야.


이제 우리와 인연이 잠시 옅어질 뿐 사라지지는 않을 나의 하나뿐인 막내아들, 덕구를 보낸다.

보낸다고 보낸 것이 아니라고.

죽었다고 죽은 것이 아니라고.

그렇게 믿어야 너를 보낸 우리의 삶이 피폐해지지 않을 것 같아 마지막 희망고문을 놓지 않는다.


환생.

그것은 짧은 이별 뒤 새 세상을 얻을 '떠난 이'와

떠난 이를 가슴에 품은 '남겨진 이'에게 하늘이 남겨줄 가장 값진 선물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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