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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먼지 Nov 08. 2023

3살 아이엄마의 대자보

누군가를 탓하기 전에

아이엄마가 대자보를 써서 엘리베이터에 붙였다.
많이 놀라고 불안했을 그녀는 같은 아파트 주민들에게 본인의 서운함을 장문의 글로 토로하기 위해 자신의 아이를 잠시 잃었던 공용 엘리베이터에 붙인 듯 하다.

아이를 놓친 본인의 잘못이 크다면 굳이 이런 글을 써서 이웃들에게 불쾌감을 조성할 필요까지는 없었을 것 같다.

3살 아이와 떨어져서 불안에 떨어야 했던 엄마는 그 순간 어디서 무얼 하고 있었는지에 대한 언급이 없다.

36개월도 채 되지 않은 어린 아이는 왜 엄마와 떨어져서 엘리베이터를 타게 되었는가. 에 대한 서사없이 그저 그 혼자였을 아이를 아무도 돌보지 않았다는 이웃들에게 책임을 묻고 있는 저 대자보는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아 내가 더 관심을 가져야 했는데."라는 아쉬움보다는 "애엄마는 뭐하고 있었길래?"라는 의구심이 먼저 들게 하지 않았을까.


본인의 의지 및 판단을 혼자서 결정할 수 없는 어린아이를 엘리베이터 안에 혼자 있도록 방치 및 유기하면서까지 댁네 다급한 일이 있으셨냐는 물음은 황당 그 자체다.

그럼 자신의 아이를 그렇게 방치 및 유기하면서까지 아이의 엄마는 어떤 다급한 일이 있으셨던 건가.

요즘말로 "남탓"하는 모양새밖에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같은 라인에 살고 계신 분들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는 대목 역시 조금 의아하다.
같은 라인이라고 한다면 한 동에 적게는 1-2호, 많게는 1-4호이상의 라인씩 30여개 층에 달하는 여러 집이 있을텐데, 그 여러 집에 사는 사람들이 3살 아이가 엘리베이터를 혼자 탔다고 해서 덥석 아이의 손을 잡거나 아이를 불러세워 "너희엄마는 어디있니? 내가 찾아줄게."라는 친절을 베풀었다가 모르는 사람에 대한 두려움으로 아이를 울려버리거나 놀래켜서 엘리베이터에서 떠나게 만들었을 수도 있는 노릇이다.

이 아이가 "나는 몇 층에 살고 우리엄마는 000입니다"라고 말이나 할 수 있는 아이일까.

귀중품을 누가 억지로 가지려 하지 않는 한 그 물건은 그 자리에 그대로 두는 게 "찾는 이"를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어쩌면 저 이웃들은 저 아이를 아이의 엄마가 찾을 가장 빠른 방법이 그 엘리베이터에 그대로 두는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옛날에는 기껏해야 아파트라도 연립식이니 한 동에 많아야 열집 내외가 살고 아이엄마들끼리 누구네 집에 애가 몇이고 친한 집들은 그 집 숟가락 개수까지 안다고 했었다.

 내가 살던 어린 시절 아파트에서 나는 엄마가 번 돈을 열심히 100원짜리 아이스크림 사는 데 썼다. 온동네 아파트에 안살고있는 아이들까지 불러다가 놀이터에서 아이스크림파티를 하고 엄마는 외상값을 결제해주러 슈퍼에 들르면 슈퍼아저씨가 "꼬맹이가 또 애들 불러서 아이스크림을 사주느라 이번주 아이스크림값만 3만원"이라는 말에 돈을 내며 기가 찼으니까.

그래도 그 아이스크림 덕분인지.어린 시절 나는 혼자일 때도 혼자인 적이 없다.

놀이터엔 아이들이든 아이들의 엄마아빠 할머니든 누구든 저집 아이는 가동 505호 말썽꾸러기 딸래미인 걸 알 사람들에게 꼴통의 꼬리를 흘리고 다녔으니까.

(5살 주제에 새총도 배우고 귤서리도 하고 놀이터 알로에도 퍼먹던 양아치였나)


저 아이의 엄마는
36층 아파트에 본인이 알고 지내는 이웃은 얼마나 됐을까.

아이의 엄마는 그 아파트에서 인사를 나누며 다른 아이들과도 얼굴을 익힐만큼 상냥한 엄마였을까.


오히려 대자보를 붙여서 서운함과 불만을 토로하기보다
본인의 책임으로 아이가 30여층에 달하는 어디론가에서 사라져버리지 않고 다시 본인에게 돌아온 점을 감사히 여기는 게 맞지 않았을까,하고 조심스레 생각해본다.

아이들을 보호해주세요. 라는 의미는 무엇인지.
혼자 엘리베이터에 타고 있는 아이를 관리사무소에 데려다 줄 친절한 어른도 분명히 있었을지 모른다.
그런데 어느 누구도 그렇게 3살도 안된 아이가 혼자 엘리베이터를 탈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을 것이고,
그 아이를 발견했을 때 자신이 혹여 "확인되지 않은 유괴범"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안쓰러움과 관심이 가도 그대로 두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남에게 책임을 돌려 굳이 공론화할 생각보다
자신이 책임지지 못한 그 짧은 순간을 반성하는 엄마가, 아이에게는 더 어른스러운 엄마가 되어주는 게 아닐까.
하고 아이없는 딩크는 짧은 생각을 적어본다.


사람아이는 낳은 적도 없어 잃은 적도 없지만,
나와 남편이 장사한다고 산책을 미루다가 놓쳐버린 내 사랑스러운 아이 덕구를 잃었던 올 여름 6월.
덕구를 치고 간 SUV차량에 대한 원망은 남아있지 않다.
아이도, 강아지도 한순간 방심으로 잃게 될 줄 안다면 엄마가 더 조심하고 챙겨야 한다.
내 아이를, 내 반려견을 내 시야에서 잃게 된 건
냉정히 말하자면
나 자신의 책임이 제일 크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내 아이의 사고에 탓할 존재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저 아이의 엄마가 조금 더 시간이 지나고, 너그럽고 어른스러운 마음을 갖게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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