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장모님과의 이별
2022년 4월 26일 오후 5시가 조금 지난 시간.
수목장 선택을 마치고 가양대교로 접어드는 찰나 아내는 장모님이 입원 중인 병원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OO병원인데요. 방금 어머님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지금 빨리 병원으로 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네? 엄마가 돌아가셨다고요? 병원으로 바로 갈게요."
장모님이 돌아가셨다는 병원으로부터의 전화...
전화를 끊자마자 아내는 오열하기 시작했다.
최근에 병원에서 장모님의 상태가 위중하다는 말을 듣지를 못했는데 이렇게 갑자기 돌아가시다니...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오빠, 어떻게... 오빠, 어떻게..."
아내는 울면서 이 말만 계속 되풀이했다.
"자기야 침착하자. 일단 친척분들께 전화를 드리자."
"오빠, 누구한테 전화를 해야 할지 생각이 안 나."
"먼저 큰 이모님께 전화를 드리고, 외삼촌께도 전화를 하면 될 것 같아."
"응. 알았어."
아내는 병원으로 이동을 하면서 큰 이모님과 외삼촌에게 장모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했다. 전화를 하는 아내의 손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나도 저녁에 언론사 후배들과의 저녁 약속이 있었지만 양해를 구하고 취소했다.
병원 앞에 도착을 했다. 큰 이모님이 병원으로 오신다고 해서 바로 병원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큰 이모님이 오시기를 기다렸다.
"아이고... 이게 무슨 일이라니..."
큰 이모님도 지금 이 상황이 믿어지지 않으셨는지 엄청 당황하셨다.
"OOO 씨 보호자인데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고 왔습니다."
"세 분이 오신 거죠? 지금 세 분이 한꺼번에 들어가실 수는 없고 보호장구를 착용하신 다음 한 분씩 병실로 올라가셔야 합니다."
코로나19가 완전히 종식되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보호장구를 착용한 뒤 한 명씩 장모님이 계시는 병실로 가야만 한다는 병원 관계자의 말이었다.
"장례식장은 어디로 하실지 정하셨나요?"
"아직 정하지 않았습니다."
"장례식장 정해지면 알려주시고, OOO님 모실 앰뷸런스 부르셔야 합니다. 병실로 올라가셔서 한 분씩 OOO님 뵙고 내려오시면 저희도 퇴원 절차를 진행하겠습니다."
병원 관계자의 말을 듣고 내가 제일 먼저 올라가서 장모님을 뵙고 온 뒤 상조회사에 전화해서 장례절차를 진행하기로 했다.
병실로 올라가 누워계신 장모님의 모습을 보니 돌아가신 게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장모님의 손을 잡았을 때 따뜻한 온기가 남아있었다.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OO 이는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끝까지 함께할게요. 하늘나라에서 편히 쉬시고 저랑 OO이 지켜주세요."
장모님께 작별 인사를 건네고 내려와 상조회사와 장례절차를 논의했다. 그리고 OO대학병원에서 장례절차를 진행하기로 했다.
OO대학병원으로 이동하기 전에 가장 친한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아내가 운전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친구에게 장례식장까지 운전을 부탁했다.
아내와 큰 이모님이 차례로 장모님과의 작별 인사를 하는 동안 상조회사에서 보낸 앰뷸런스가 도착했다. 내가 앰뷸런스를 타고 OO대학병원 장례식장으로 가고, 아내와 큰 이모님은 친구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뒤따라왔다.
상조회사와 장례절차를 논의했다. 지방에서 올라오실 친척분들을 생각해서 다음날 오전 빈소를 열기로 했다. OO대학병원에 도착해서 장모님을 안치실에 모시는데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장모님의 시신이 차가운 안치실 냉장고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눈으로 직접 보면서 장모님이 돌아가셨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어서였을까... 가슴이 너무 아프다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비로소 알 수 있었다.
다음 날 오전 장례식장에 빈소를 설치하고, 처가 쪽 친인척분들을 비롯해 나와 아내의 지인들에게 부고 문자를 보내는 것을 시작으로 장모님에 대한 장례절차가 시작됐다.
장모님의 장례를 치르는 3일 동안 정말 많은 분들이 위로를 보내주셨다. 친인척분들은 3일 내내 빈소를 지켜주셨고, 가장 친한 친구와 아끼는 언론사 후배는 자신의 일인 것 마냥 퇴근하면 빈소에서 조문객을 맞아주었다.
나와 아내의 지인들도 한달음에 달려와 고인에 마지막 인사를 전하는 동시에 아내에게 따뜻한 위로를 건넸다. 그리고 회사를 그만둔 지 1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장례에 필요한 모든 물품을 지원해 준 대표님과 직접 빈소를 찾아주셨던 편집국장님 등 감사한 분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3일간의 장례절차가 끝나고 발인날이 왔다. 아내는 아직도 장모님이 돌아가신 게 실감이 나지 않는 듯했다.
"오빠... 엄마가 돌아가셨다는 게 믿어지지 않아. 왜지? 지금 왜 우리가 이러고 있는 거지? 나는 아직 헤어질 준비가 전혀 되지 않았는데..."
장례식장을 떠나 화장장으로 이동할 때까지도 아내는 장모님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해 보였다. 그런 아내를 말없이 안아주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아내는 화장이 끝나고 나서야 비로소 장모님의 죽음을 인정했다.
"오빠, 아직 유골함이 따뜻해. 수목장으로 갈 때까지 꼭 안고 있을래."
화장을 마치고 수목장으로 이동할 때까지 아내는 온몸으로 장모님의 유골함을 품고 있었다. 아내는 그렇게 장모님과 이별의 시간을 보내는 듯 보였다.
장인어른의 임종을 대비해 준비했던 수목장에 장모님을 먼저 모시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그것도 수목장 계약을 한 그날에... 따뜻한 4월의 봄날 자식들이 더 이상 고생하지 않길 바라는 장모님의 큰 뜻이었을까?
꽃을 매우 사랑하셨던 장모님은 봄꽃이 활짝 핀 4월에 하늘로 꽃놀이를 떠나셨다.
"엄마... 그동안 너무 고생 많았어. 아무 걱정하지 말고 편히 쉬세요. 엄마 딸이어서 너무 고맙고 행복했어. 다음 생엔 내가 엄마 할게. 엄마가 내 딸로 태어나 주세요."
그렇게 아내는 장모님께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