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틀비 씨, 우리 또 만나요!
나는 평화주의자다. 거창한 의미로서가 아니라 가까운 사이든 생판 모르는 사이든 누군가와 갈등하고 싸우는 일을 싫어한다. 그래서 종종 손해를 감수하고 배려라는 말로 스스로의 행동을 포장하지만 속으로는 외친다.
"그렇게 안 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나는 갈등을 유발할 말을 꿀꺽 삼키고 속 마음을 숨긴다. 하지만 소설 <필경사 바틀비>에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물기 없는 목소리로 단호하고 일관되게 말하는 이가 있다. 그는 서술자 변호사인 '나'가 새로 구한 필경사 '바틀비'다. 그는 일 좀 하나 했더니 주어진 업무(나중엔 이마저도)를 안 하겠다며 차분하고 일관되게 같은 말을 반복한다.
"그렇게 안 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의 말이 단순한 거절이거나 사회성의 부족이거나 자기 일을 남에게 떠 넘기기 위한 이기심의 발로이지는 않다. 왜 그러는지 사연은 알 수 없으나 그는 일체의 모든 일을 거절한다. 필경사로서의 일도, 사무실을 무단으로 점거한 그에게 내려진 퇴거 명령도, 심지어 먹는 일마저도 그는 모두 거절하며 죽음으로 뚜벅뚜벅 걸어간다. 어쩌면 그가 할 수 있는 일, 마지막으로 자신의 의지로 할 수 있는 일이 "그렇게 안 하는" 것이라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이 이해하기 힘든 사내를 읽으며 도대체 그는 왜 안 하고 싶은 것인지 궁금했다. 하지만 끝내 소설은 이 궁금증을 풀어주지 않는다. 그는 끝끝내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 정말 죽음을 맞이하고 만다. 필경사로서의 그의 일은 부동산 양도증서나 권리증, 온갖 난해한 서류들을 옮기는 일이었다. 이 소설이 무려 허먼 멜빌의 작품이라는 점에서 그의 이런 행동이 서류에 적힌 '글자'는 '글'이 될 수 없어서는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이야기가 아닌 글자들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아니었으므로 그는 시종일관 '그렇게 안 하고 싶다'라고 외칠 수밖에 없었다고 말이다. 바틀비야 말로 안 하고 싶은 것을 하지 않음으로 역설적으로 삶의 주인으로 살아냈다고 생각하니 그의 '안 하고 싶다'가 새삼 대단해 보이기도 했다.
요가 매트에 발을 디디고 서며 불현듯 바틀비가 떠올랐다. 실은 너무 힘들어서 그만두고 싶어 그의 이름이 떠올랐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요가를 마무리하며 바닥에 등을 대고 두 눈을 감은 사바아사나에서 생각했다. 아마도 그렇게 안 하고 싶은 바틀비의 선언과 실천이 매트 위에서 어떻게든 해 보려고 바둥거리는 나의 모습과 닮아 그런 모양이라고 말이다. 매트 위에 몸을 대고 있는 동안에는 나를 부르는 이도 찾는 이도 무엇인가를 해 줄 것을 바라는 이도 없다. 매트 위에서 나는 내 숨과 몸에 집중한다. 마치 세상이 원하는 역할에 '그렇게 안 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하듯이 말이다.
그렇다고 내가 바틀비처럼 살겠다는 것은 아니다.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와 같이 극단적으로 하지 않음을 선택하며 살아가기 어렵다는 것쯤은 잘 안다. 그러니 살 길을 찾을 밖에다. 누군가는 테니스 라켓을 들고 코트로 나가고 누군가는 수영복을 입고 물속으로 첨벙 들어간다. 내가 요가 매트 위에서 숨을 고르고 내 쉬는 순간은 세상의 요구에 '그렇게 안 하는' 시간이고 잠시 바틀비가 되는 시간이기도 하다. 다들 알겠지만 바틀비와 같이 삶의 주인으로 살아내는 일은 말처럼 쉽지 않다. 바틀비에게 회유와 협박, 험담이 끊이지 않았던 일은 그가 끝끝내 삶의 주인으로서의 주장을 굽히지 않아서다. 평화를 사랑하는 나는 회유와 협박, 험담이 오기도 전에 알아서 스스로 주인으로의 자리를 내려놓고 타협점을 찾는다. 그렇지만 매트 위에서는 다르다. 틀어질 대로 틀어진 골반을 열어 내며 '아, 악' 소리를 내는 동안 나는 내 몸의 주인으로서의 고통을 느끼며 숨을 들이마시고 내 쉰다. 저마다의 삶에 주인으로 살아낸다는 것은 고통이 따른다는 것을 몸소 체험하는 시간이다.
하지만 이 고통도 사바아사나에 오면 잊힌다. 거친 숨을 가다듬으며 두 눈을 감고 등을 완전히 매트에 대고 눕는 이 자세는 시체자세로 불린다. 매우 쉬워 보이지만 제대로 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은 자세라고 한다. 등을 대고 누워 힘을 빼 보려고 안간힘을 쓰는 내 수준은 아직 제대로에 해당되지 않는다. 완벽하진 않지만 사바아사나를 하며 죽음이 아닌 새로운 삶을 떠올려본다. 아사나가 끝나고 몸을 일으켜 매트 위에 반듯하게 앉을 나는 아마도 이 교실을 나서며 또다시 하고 싶지 않은 일을 가뿐히 해 내며 살아갈 거다. 하지만 그렇다고 서럽거나 서운하거나 쓸쓸하지 않다. 다음의 요가가 나를 기다리고 있고 그 시간만큼은 또 그렇게 안 해도 되는 시간이 될 테니 말이다.
바틀비 씨, 우리 또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