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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곳에서는, 부디

시어머니의 부고

by 윤슬 걷다

사별한 지 23년이 되었다. 그리고 며칠 전, 시어머니의 부고 소식이 날아왔다.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딸아이 비행기표를 알아봐야겠다’는 엄마로서의 역할이었다.

자기 아빠와 연결된 가장 큰 연줄이 끊어지는 딸아이의 마음이 걱정되었다.


나는 근무 중이었고, 장애인 한 분과 외출 중이었다.

운전대를 잡은 채 시어머니 생각이 자꾸 떠올랐다.


아이 아빠의 장례식에서, 어머님은 울부짖었다.

“내가 손가락이 다 동상에 걸려 터지도록 굴을 까서 저 자식 대학 공부시켰는데...”


아들과 딸이 연이어 서울 신촌의 명문대에 합격했으니,

엄마로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해 자식들 뒷바라지를 하셨을 거라는 것을,

같은 세대의 부모를 둔 나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자식을 먼저 보낸 어머니가 지난 23년의 세월을 어떻게 살아내셨을까...

나는 남편과 사별한 뒤, 어린 딸아이의 손을 꼭 잡고 한국을 떠났다.

그렇게 오게 된 호주에서, 나는 딸과 함께 살아남기 위해 매일을 사투를 벌였다.

그런 시간 속에서도 아이 아빠는 오랫동안 내 꿈속에서 살아 있었고, 아이는 출장 간 아빠를 기다렸다.


아이가 다섯 살, 여섯 살쯤 되었을 무렵, 한국 방문을 앞두고

“출장 간 아빠가 혹시 돌아왔을까?라고 혼잣말처럼 아이가 뇌 아렸을 때 나는, 아빠가 어디에선가 살 수 있는 물건이기를 수도 없이 바랐다.


처음 10년 동안은 매년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어머니를 찾아뵈었다.

남편을 잃은 나의 참담함,

아빠를 잃은 딸아이를 보는 나의 애통함을

가장 가까이에서 함께 느껴주신 분은 어머니셨다.

아니,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고통에 가장 가까이에서 공감한 사람은 나였는지도 모른다.


정이 많으셨던 그분은 서울 사는 우리가 주말마다 찾아가면

손질한 꽃게며 말린 굴비, 갓 딴 굴, 집에서 직접 빚은 이북식 만두까지

우리 집은 물론이고 내 친정 엄마 몫까지 바리바리 챙겨주시곤 했다.

다른 사람들은 친정에서 받아오는 것들을, 나는 시어머니께 받아왔다.


10여 년 전 한국에 방문했던 어느 날,

우리는 식당에서 소주를 함께 마셨다.

어머니는 조용히 말씀하셨다.

내가 너를 보면… 너무 가슴이 아프다.”

우리는 부둥켜안고 울었다.


그리고는 더 이상 어머님을 찾아뵙지 않았다.

가슴 아픈 일들을 이제는 잊고 싶었던 것 같다.

어머니도, 가족들도 더 이상 나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그분은 아들이 못 견디게 그리울 때, 딸아이에게 몇 번 연락을 하셨던 것 같다.


그 어머님이

아니, 이제는 남이 된 지 오래인 그분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으니—


서른한 살에 남편을 잃고 혼자가 되었던 그때의 서러움이,

아빠 얼굴조차 기억하지 못하고 평생을 살아가는 딸아이를 바라보며,

엄마로서 감당할 수 없었던 그 애통함이

차마 어떻게도 해결할 수 없어서 굳게 봉인해 놓은 슬픔들이 내 안에서 마구마구 튀어나왔다.

마치 판도라의 상자를 연 것처럼.




어머니,

사람이 한평생 살며 겪을 수 있는 가장 극한의 고통을 견디신 나의 어머니.

부디 그곳은 아들, 딸, 남편, 가족으로 인한 애끓는 고통이 없는 세상이기를 바랍니다.

이제는, 정말 편히 쉬세요.

어머니, 고맙고… 감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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