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하고 잔잔해보이지만 예사롭지 날카로움이 숨어있는 글
15쪽
길은 사람의 다리가 낸 길이기도 하지만 누군가의 마음이 낸 길이기도 하다. 누군가 아주 친절한 사람들과 이 길을 공유하고 있고 소통하고 있다는 믿음 때문에 내가 그 길에서 느끼는 고독은 처절하지 않고 감미롭다.
55쪽
보통 사람이 그렇게 귀할 수가 없었다. 내가 가장 보통이라고 생각하고 내세운 조건은 어쩌면 가장 까다로운 조건인지도 몰랐다. 나는 우선 사돈을 맺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보통 가정을 내 둘레에서 찾아보기 시작했다. 역시 귀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러면 내 집은 남이 보기에 보통일까? 거기 생각이 미치자 그것조차 자신이 없는 게 아닌가, 우선 주부가 글을 쓴다고 툭하면 이름 석 자가 내걸리고, 살림은 건성건성 엉터리로 하는 가정이 어디 보통 가정인가, 나는 그만 실수를 터뜨리고 말았다. 보통 사람은 나에게만 어려운 게 아닌 모양이다.
65쪽
숱한 꿈은 자라면서 맞닥뜨린 현실에 혼비백산, 지금은 편린조차 지니고 있지 않다. 나는 그때 내가 어떤 꿈을 꾸었는지 생각해낼 수가 없다. 다만 그 꿈과는 동떨어진 모습이 되어 늙어 가고 있음을 알 뿐이다. 하루하루를 사는 내 모습이 별안간 나앉은 나의 옛집의 모습만큼이나 초라하고 어설프다는 걸 알 뿐이다.
201-202쪽
아이를 누가 기르느냐가 문제였다. 시댁은 시골이고 아무리 생각해도 나 아니면 길러줄 사람이 없었다. 딸의 일을 위해서 내 일을 희생하느냐 마느냐로 나는 심각하게 고민했다. 가정을 가진 여자가 일을 갖기 위해서 딴 여자를 하나 희생시켜야 한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느낌은 매우 맥 빠지고 낭패스러운 것이었다.
자신의 삶을 통해 체험한 여자이기에 감수해야 했던 온갖 억울한 차별 대우를 딸에게만은 물려주지 않으려는 어머니들의 진지한 노력과 간절한 소망에 의해 여성들의 지위가 더디지만 조금씩이라도 나아가고 있는 게 아닐까.
216쪽
자랑할 거라곤 지금도 습작기처럼 열심히라는 것밖에 없다. 잡문 하나를 쓰더라도, 허튼소리 안 하길, 정직하길, 조그만 진실이라도,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진실을 말하길, 매질하듯 다짐하며 쓰고 있지만, 열심히라는 것만으로 재능 부족을 은폐하지는 못할 것 같다.
236쪽
작가의 눈엔 완전한 악인도 완전한 성인도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한테 미움받은 악인한테도 연민할만한 인간성을 발굴해낼 수 있고, 만인이 추앙하여 마지않는 성인한테서도 인간적인 약점을 찾아내고야 마는 게 작가의 눈이다. 그리하여 악인과 성인, 빈자와 부자를 층하하지 않고 동시에 얼싸안을 수 있는 게 문학의 특권이자 자부심이다. 작가의 이런 보는 눈은 인간 개개인에게뿐 아니라 인간이 만든 사회나 제도를 보는 데도 결코 달라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