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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키지 못한 집

by 루비하루

공상은 인정받았지만, 또 하나의 소송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방의 임차인.

전세보증금을 제때 돌려주지 못한 채,

역전세로 물린 부동산.

세입자는 이미 임차권 등기를 설정했고, 보증보험사로부터

전세보증금을 전액 반환받았다.

나는 다음 세입자를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했지만, 세입자는 집을 보여주지도 않고,

집 번호조차 알려주지 않았다.

그런데도, 유명 법무법인에 사건을 의뢰해 지연이자와 정신적 피해 보상 명목으로 1,000만 원의 손해배상 청구를 해왔다.


‘억울한 건 저인데, 왜 제가 가해자인가요···’

나는 그렇게 울먹이며, 탄원서를 썼다.


하지만 세상은 그런 사정을 묻지 않았다.

전세금을 제때 돌려주지 못한 순간, 나는 이미‘전세사기범’이라는 낙인이 찍혀 있었다.

뉴스에서는 매일같이 전세 사기에 대한 경고가 쏟아졌고, 그 시선은 임대인을 무조건 가해자로 만들었다.

사회는 복잡한 사정을 보려 하지 않았다.

그 분위기를, 임차인도 눈치챘을까.

어쩌면 누군가가 조언했을지도 모른다.

“전세 문제는 무조건 임차인이 이겨요.”

“요즘은 판사도 다 그렇게 봐요.”

그 말이 사실이든 아니든, 적어도 그들은 자신들이 절대적인 피해자라고 믿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믿음 속에서 철저히 가해자로 굳어져 갔다.

하지만 나도, 피해자였다.

부동산 하락, 병, 소송, 휴직, 공백.

이 모든 것이 겹쳤을 뿐인데, 누군가는 그것을 이용했고, 나는 끝내 침묵했다.

감정도, 사실도 그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는 싸움이었다.

나는 재판부에 진심을 담은 탄원서를 제출했다.




조정기일


하지만 내가 자리에 앉자마자 조정관이 내민 건 ‘내용’이 아니라 ‘금액’이었다.

누가 뭘 했는지, 누구 잘못인지도 묻지 않았다. 그저 사건을 빨리 끝내고 싶은 기색이 역력했다.

“원고 측에서 1,000만 원 제시했고요.

그럼··· 중간인 500만 원 선에서 마무리하는 건 어떨까요?"


순간, 머릿속이 멍해졌다.

‘이게 조정인가? 이게 재판인가? 내용도 안 보고, 금액 중간이면 끝이라는 건가?’

“이건 피고한테 유리한 조건이에요. 지금 합의하면 끝납니다. 시간 아깝잖아요.”

지쳐 있었던 나는 솔직히 마음이 흔들렸다.

정신적 피로감이 이미 임계점에 도달한 상태였다.


그러자, 원고 측 변호사는 딱 잘라 거절했다.

“아닙니다. 최소 1,000만 원은 받아야 합니다. 명백한 피고 책임입니다.”


조정은 결렬되었다.


다시 재판기일이 잡혔다.

상대측 유명 법무법인은 보충서면을 제출했다.

나는 또다시 답변서와 탄원서를 밤새워 써 내려갔다.

새벽까지 붙잡고 있다가 전자소송 시스템에 겨우 업로드했다.



재판 당일.


나는 법정에서 직접 진술했다.

손이 떨렸고, 목소리는 자꾸 갈라졌다.

판사가 서류를 넘기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재판 전날 밤에 답변서를 내면 검토할 시간이 없지 않습니까? 상식적으로 생각 좀 하시죠."


나는 멍해졌다.

귀는 잘 들리지 않았고, 판사의 목소리는 멀리서 울리는 종소리 같았다.

이명은 더 심해졌고, 결국 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잘 안 들려서요... 죄송합니다...”

남편이 옆에서 급히 말을 이었다.

“원고는 임차권 등기 후에도 집에 계속 거주했고,

열쇠도 반환하지 않아 임대인인 저희는 새로운 세입자를 구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원고는 이런 사정을 사전에 알리지 않았고, 갑자기 소송을 제기하였습니다. 이는 원고가 주장하는 ‘특별손해’에 해당하지 않습니다.”


판사가 법원 직원을 향해 말했다.

“방금 그 부분, 메모해 주세요. 남편분 말씀 중에 있었던 그 부분.”


그리고 곧, 재판은 끝났다. 10분도 채 되지 않았다.

그 짧은 순간에, 나는 10년은 늙은 기분이었다.


“판결일에는 안 오셔도 됩니다. 오늘로 재판은 종결합니다.”


며칠 후, 전자소송 사이트에서 판결 결과를 확인했다.


‘원고 일부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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