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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CHO Mar 13. 2021

나는야 일개미 출장 대행사의 대표(2)

스타트업 CTO의 출장 뒷이야기

2019년 11월에 항공사 승무원들의 파업은 처음 겪는 일이었지만,

나는 미국에서, 남편은 독일에서 나름 대처를 잘했다고 생각해 우리 둘 모두 뿌듯했던 경험이었다. 이보다 더 한 일이 생겨도 나름 괜찮은 팀워크를 자랑하는 우리이니, 잘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도 얻었다. 하지만 세상 일은 언제나 그렇듯 내 맘처럼 굴러가지만은 않는다.


2020년 3월 11일,

오늘도 나는 작은 아이를 링크에 넣어놓고 평소에 친하게 지내는 Ms. Phyllis와 채팅 중이었다.

오늘 낮에 학교 재단 이사장이 학부모들에게 학교 CEO인 Larry Rosenstock의 은퇴를 알린 터였다. 학교 설립부터 지금까지 근 20년 넘게 일한 CEO의 은퇴는 나름 큰 충격이었고, 학부모로서 앞으로 학교 운영 방향이 어떻게 변하게 될지도 몰라 걱정스러웠다. 학교 설립 초창기 멤버인 필리스 선생님은 이미 우리 학교를 떠났지만, 개인적으로 이들과 함께 일한 사이였고 이런저런 루트로 학교와 연결이 되어 있었기에 누가 CEO가 될지, 래리의 은퇴에 나름 숨겨져 있는 사정이 있는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아이 연습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President Trump Restricts Travel from Europ for 30 days
나에게 코로나로 인한 트럼프의 유럽 봉쇄를 알려준 필리스 선생님의 문자.

집에서 TV를 보고 있던 선생님이 트럼프가 유럽발 항공기의 미국 입국을 봉쇄하는 정책을 시행했다며, 3일 전에 독일로 출장을 떠난 남편을 걱정하는 문자를 보내주었다. 놀라게 해서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이 일은 놀라서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고 허둥대야 하는 일이 아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남편을 예나에서 빼내 와야 했다. 여기서 발이 묶이면 더 많은 시간을 밖에서 보내야 할 것이었다. 그러려면 뭐부터 해야 하나. 아 맞다. 발권한 여행사에 전화해야지. 그러던 찰나, 남편에게 연락이 왔다.

역시 이 뉴스를 본 남편 동료들이 전화로 남편을 깨워 무조건 최대한 빨리 나오라고 말했단다. 남편은 짐을 싸며 돌아가는 티켓 일정을 변경할 수 있는지 물어보라고 하며, 만에 하나 티켓 변경이 안 되어 이 티켓을 버리더라도 걱정하지 말란다. 이미 동료들에게 편도 티켓을 알아봐 달라고 부탁을 했다고.


우리 집에서 발권하는 모든 티켓을 전담해 주는 우리 집 단골 여행사가 있다. 이 곳에 전화하기 전에 항상 최저가를 구글 플라잇을 통해 최저 가격을 알아보는데, 단 몇 푼 일지언정 여기가 항상 더 싸서 믿고 맡기는 곳이다. 텍사스에 있는 한인 여행사인데, 얼굴 한 번 본 적 없지만, 고객과 서비스 제공자로 시간이 쌓여가면서 가족 안부도 묻고, 발권 중에 가끔 개인적인 하소연도 하는 사이이다. 빨리 여기에 전화를 해야 한다.

"XX 씨, 트럼프가 지금 미국에서 유럽 도착, 출발 모두 봉쇄한대요! 남편 티켓 변경 좀 빨리 해 주세요! 금요일 전까지 들어올 수 있는 티켓 아무거나 괜찮아요"

"네?"


그제야 티브이를 켜고 대략적인 상황을 파악하신 사장님. 대체 편 마련되는 대로 연락을 주겠다더니 한참이 지났는데도 연락이 없다. 이쯤 되면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 플랜 B, C를 세워야 한다.

봉쇄는 금요일 새벽부터 유효하니. 그 안에 들어와야 한다.

' 유럽 봉쇄에 미국-영국 구간은 빠져있다. 그렇다면 프랑크푸르트-샌디에고 구간 직행 구간 루프트 한자 티켓이 부킹되어 없어지면,  번째로 알아봐야 하는 것은 런던-샌디에 구간 영국 항공 노선이다. 하지만 프랑크푸르트-런던 구간 티켓 구하기가 쉬울까? 차라리 예나에서 가까운 다른 공항을 통해 미국으로 돌아오는 것도 생각해 봐야겠다. ㅇㅋ 그럼 라이프치히나 베를린 구간도 리스트업  놓자. 이마저도  구해지는 최악의 상황이 되면 별수 없이 아시아에서 갈아타 태평양을 건너오는 수밖에. 아시아-미주 구간은 봉쇄령에 해당되지 않으니까'

이렇게 마음먹고 나니 좀 덜 불안하다.


한편 독일의 현지 시간은 새벽 2시 반.

우리 일개미씨는 며칠 전 풀어놓은 출장 짐을 다시 싸고, 호텔에도 체크아웃하겠으니 택시를 불러달라고 이야기해 두고서는 다음 스텝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기존 티켓 스케줄 변경이든, 편도 티켓이 구해지든 일단 공항으로 가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했으나,  그 새벽에 호텔에서도 택시 잡기가 쉽지는 않았을 터. 나도, 남편의 회사 동료도, 호텔의 연락 모두를 일개미씨는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지만 셋 다 연락이 없었다.


거의 동시에 편도 티켓과 변경된 스케줄이 확정되었다. 이후 일개미씨도 호텔이 불러준 총알택시를 타고 예나에서 가장 가까운 DE역이 있는 Erfurt까지 날아가 새벽 3시 53분 출발 예정인 프랑크푸르트행 기차를 출발 4분 전에 탑승했다고. (독일에도 총알택시가 있다는 사실은 처음 알았다)

샌디에고행 티켓도 구했겠다, 공항으로 가는 직행 열차도 탔겠다, 이제 이 소동의 9부 능선은 넘은 셈. 그제야 우리 둘 다 한 숨 돌릴 수 있었다. 그런 남편에게 여행사 사장님이 해 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우리의 연락을 받고 독일 루프트 한자 본사에 연락했을 때, 현지 시간은 새벽 2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사장님 전화를 받고서야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 그제야 알게 된 루프트 한자 측은 한편으로는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이 사태에 대해 파악을 하는 동시에, 고객들에 대한 티켓 취소 및 변경에 대한 방침을 부랴부랴 내부 회의를 통해 정해야 했었다 한다.


사전 협의 없이 결정된 대유럽 봉쇄 정책. 그 결과 빚어진 혼선은 여행객들과 회사들의 몫.

트럼프의 영국을 제외한 30일간의 대유럽 봉쇄 정책이 사전에 상대국들과 아무런 논의가 되어 있지 않았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토록 무례하고 제멋대로인 미국의 대통령이라니! 한숨만 나올 뿐이다.  그 불똥은 상대국뿐만 아니라 자국의 국민들에게도 영향을 끼치는데, 이런 점들을 고려는 하신 건지.ㅠ

https://www.nytimes.com/2020/03/12/world/europe/europe-coronavirus-travel-ban.html

암튼 이런 이유로 티켓을 처리하는데 평소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며, 우리가 빨리 연락해 준 덕에 유럽에 나가 있는 다른 고객들의 티켓도 타 여행사들보다 신속하게 처리할 수 있었다고 고맙다고 하신다.

고맙기는요. 사장님의 발 빠른 처리 덕분에 일개미씨 항공권도 무사히 구했고, 편도 티켓도 원활하게 처리할 수 있었는데요. 저희가 감사하죠..


여기까지가 그 날의 기록이다.

공항은 예상외로 조용했다고. 하긴 사태가 벌어지고 난 후 5시간 반 만에 공항에 도착해 수속을 밟고 8시간 후에 샌디에고행 비행기가 이륙했으니 그랬을게다. 그렇게 무사히 집에 돌아온 일개미씨와 우리 가족 모두 2주 자가격리를 시작했고, 격리가 시작하자마자 학교가 폐쇄되어 오늘까지도 학교에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트럼프의 유럽 여행 금지 명령이 발동되기 전까지, 우리는 한가로웠다.

유럽이 코비드 때문에 난리였지만, 남편이 있는 예나는 상황이 괜찮았기 때문이어서 3월 말 봄방학 때 계획했던 영국 여행을 갈까 말까 하던 중이었다. 지금 그때의 톡을 보면 코비드에 대해 우리가 얼마나 생각이 없었는지 얼굴이 화끈거릴 지경이다. 하지만 이렇게 될 것이라고 누군들 예상했었겠는가..


2010년에 연구실에서 세 명의 공동 창업자와 기술 기반 회사를 창업한 이후 오늘까지, 일개미씨의 일상은 불확실성의 연속이다. 회사를 운영하면서 막상 불확실성이 위기로 다가왔을 때, 남편은 나에게 아무 말도 못 하고 속으로만 앓았다. 내가 걱정할까 봐. 그리고 위기가 가시고 난 다음에 나에게 상황을 이야기해 준다. 이런 일 때문에 힘들었었노라고. 그래서 남편이 예민해져 있을 때, 회사에 무슨 일이 있겠거니.. 하고 짐작하고 있으면 대개는 맞다.

재미있는 것은 일개미씨는 불확실성을 정말이지 체질적으로 싫어한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이 박사 학위를 받고 가장 불확실하고 아무것도 보장해 주지 않는 세계에 뛰어들었다. 무엇이 이 사람을 여기로 이끌었는지 가끔 의아할 때가 있는데, 중요한 점은 자신이 부딪힐 불확실성을 줄이고자 미리미리 최대한 대비한다는 점이다. 원래부터 완벽주의에 가까웠던 일개미씨의 일에 대한 준비성은 스타트업에 조인하면서 그 정도가 더욱 심해졌다. 왜 안 그렇겠는가. 당장 3개월 앞도 내다볼 수가 없는 경우가 파다하다는데.

예상외의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익숙한 남편이지만, 그럼에도 이런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지면 당황할 수밖에 없다.

스타트업 하는 남편을 둔 와이프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위기관리 능력이 덩달아 올라간다. 매사에 태평한 나지만 타의에 의해 미리미리 준비하는 것도 연습이 된다. 그리고 남편이 예민해져 있을 때,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 인내심의 한계도 넓어진다. 그 덕에 남편에게 패닉이 와도 나는 정신을 부여잡고 플랜 B, C를 생각할 수 있다.

이쯤 되면 거의 남편의 비서다. 저 사태가 벌어지고 난 후 후처리를 하느라 나는 한참 동안 호텔과 여행 대행사, 그리고 카드사와 한참 씨름해야 했다. 내가 얼마나 열심히 챙기느냐에 따라 우리 집에 얼마가 되돌아오느냐가 결정되므로. 이런 일까지 하기엔 일개 미씨는 너무 바쁘다.


2021년 3월 12일.

저 소동이 마무리된 지 꼭 일 년째 되는 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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