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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CHO Mar 06. 2021

나는야 일개미 출장 대행사의 대표(1)

스타트업 CTO의 출장 뒷이야기

작년 3월 중순으로 기억한다.

WHO가 코로나 상황을 전 세계적인 팬데믹으로 선언하면서, 트럼프 대통령이 아무런 '사전 조율 및 준비 없이' 유럽에 대한 일방적인 봉쇄를 선언했다. 그때 남편 일개미씨는 독일 예나에 출장 중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남편이 샌디에고로 돌아오는 복편 비행기에 무사히 몸을 실었지만, 나는 남편이 집에 들어올 때까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날 밤, 긴박했던 그 날 저녁에 대해 써 놓은 글을 다듬어 이제야 올린다.


지금으로부터 딱 2주 전, 나는 이 시간에도 깨어 있었다.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나는 정말 잠이 많다. 고등학교 시절에도 짝꿍이 기껏 생각해줘서 책상에 엎드려 자는 나를 깨워줘도 오만 인상을 다 쓰며 짜증 냈던 나다. 고마워하기는 커녕..

그런 내가 남편이 출장 비행기에 있는 동안에는 잠을 못 잔다. 자더라도 선잠 들기 일쑤.


올 해로 10년 차에 들어가는 메디컬 디바이스 스타트업 공동창업자이자 CTO인 일개미씨.

남편은 일 년에 최소한 세 번은 최소한 일주일에서 열흘짜리 출장을 간다. 이 회사에서 일한 10년 동안 전반기에는 주로 한국과 일본을 자주 갔었고, 후반기인 2016년부터 구 동독 지역인 예나(Jena)로 일 년에 최소 두 번씩은 다녀온다.


나 귀양 갔다 올게


예나의 중심 시가지에 있는 예나 성당. 이 곳에서 종교 개혁의 선구자인 마틴 루터가 설교도 했었다고.

처음엔 나름 유럽으로 출장 간다며 신나 했었던 그였다. 한데 어느 순간부터 이 출장이 ‘귀양살이'로 바뀌었다. 회사 실험실-호텔-식당만을 왔다 갔다 하는 데다 실험이 길어지면 그마저도 실험실로 식사를 시켜먹으니 사육되는 기분이라고. 놀고 싶어도 놀 거리가 없단다.


그런 곳을 2019년 작년 한 해에만 세 번 갔었다. 11월 한 달 동안에 무려 두 번을 왔다 갔기 때문에 집에서 잔 날보다 독일에서 머문 날들이 더 많았다.

11월 첫 번째 출장에도 약간의 에피소드가 있었는데, 독일에 가 있는 동안 루프트 한자 승무원들이 48시간 시한부 파업에 들어간 것. 그래서 원래 타고 오기로 예약되어 있던 남편의 비행 스케줄 전 두 편이 취소되었다. 만약 승무원들의 파업이 연장된다면 남편이 타고 올 비행기도 취소되는 상황

파업 또한 기상악화나 안전 결함급의 불가피한 비상상황으로 취급된다. 역시 유럽 항공사답다.

나는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서 유럽 출장은 가능한 EU 회원국의 국적 항공사를 이용하도록 스케줄을 짠다. EU261 규정 (Regulation No 261 / 2004 혹은 EC 261/04)에 의거해 항공기의 연착, 취소 등에 대해 보상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비행 편 취소 가능성이 높아지자 남편에게 루프트한자 측에 어떤 부분에 도움을 받을 수 있는지, 혹은 받을 수 없는지 알아보게 하고, 나는 EU 261 규정을 꼼꼼히 체크했다.

시간이 돈인 스타트업 CTO에게 있어 예상치 못한 이유로 스케줄이 늦어진다면, 이로 인해 조정해야 할 스케줄이 한 두 개가 아닐 것이다. 남편의 스케줄표는 미팅과 업무, 그리고 아이들 관련 스케줄로 꽉 차 있다. 이를 재조정하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칠 터, 이에 대한 보상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는 남편 대신 내가 체크해서 우리가 요구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알아놔야 챙겨 받아야 할 우리의 권리를 최대한 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행자 보험이 있는 카드들을 연회비가 비싸도 유지하고 이 카드로 출장 항공료와 호텔비를 결제한다. 보통 이런 카드들은 라운지를 쓸 수 있는 혜택이 따라오고 비싼 연회비를 상쇄할만한 혜택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혜택을 쓰기 위해 필요 없는 여행을 한다면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결과를 초래하겠지만, 예상되는 출장 횟수가 대강 나와 있으니 혜택을 최대한으로 받을 수 있는 방법들을 선택할 수 있다. 라운지는 출장러에게 없어서는 안 될 오아시스 같은 것이다. 우리 일개미씨도 라운지 이용이 자유로워지자, 출장의 질이 높아졌다며 행복해했다.


지금이야 회사가 어느 정도 안정적인 상황이라 이런 불가피한 상황에 대해 돈 걱정을 안 하고 대처할 수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지!

투자받기   정부 지원금만으로 회사를 운영했던 빠듯했던 시기엔 출장이라도 갈라치면 온갖 비용을 줄이기 위해 쥐어짜야만 했었다. 호텔 대신 에어비앤비를 썼고, 택시비를 줄이기 위해 우리 일개미씨는 종종 출장 가방을 밀며 걸어 다녔다. 관광도  . 피치 못하게 우버를 이용할 때는 합승 요금인 우버  서비스를 선택했고, 그래서 보스턴 외곽의 에어비앤비를 찾아가다가 기사가 숙소 부근에 떨렁 내려놓고  버리는 통에 초행길에 에어비앤비 숙소를 찾느라 땀을 뻘뻘 흘린 적도 있었다. 미국 대도시 외곽이 얼마나 우범지대가 많은데..  이야기를 듣고 나도 무척 놀랐고, 웬만하면 출장 가서는 목적지 앞까지 데려다주는 서비스로 선택하라고 신신당부한 적도 있다.

항공료도 줄여야 하니 가격 상한선을 정해 놓고 그 미만의 가격대에서 최단 시간에 오는 스케줄을 골랐다. 어차피 비즈니스 타고 가는 것이 아니니 이왕이면 비행기라도 새 거 타고, 좌석이 1인치라도 넓은 거 타고 가라고 기재 체크하고, 루트 체크해서 호텔 혹은 에어비앤비 선정까지 다 내가 했는데, 어느 날엔가 남편이 이제 회사에서 출장 관련 전담팀이 있으니 더는 내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한다. 그 후로 이 팀을 통해 출장을 한 번 다녀오더니 그냥 예전처럼 나보고 하란다. 출장이 너무 힘들었다며.. 와이프가 꼼꼼하게 챙겨서 정해주는 출장 스케줄이 별 게 아닌 게 아니었던 거다.


예나 출장에 동행했을 때 예나 대학 부근의 한 카페에서 찍은 사진. 모두 다 쓸어오고 싶을 만큼 예쁜 나무 공얘품들이 너무 많았다!


다시 루프트 한자 승무원 파업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결국 파업은 48시간 이후 연장되지 않았고, 일개미씨의 항공편은 취소되지 않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다.

허나 이 소동은 2주 전 갔었던 출장의 서막에 불과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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