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업 CTO의 출장 뒷이야기
작년 3월 중순으로 기억한다.
WHO가 코로나 상황을 전 세계적인 팬데믹으로 선언하면서, 트럼프 대통령이 아무런 '사전 조율 및 준비 없이' 유럽에 대한 일방적인 봉쇄를 선언했다. 그때 남편 일개미씨는 독일 예나에 출장 중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남편이 샌디에고로 돌아오는 복편 비행기에 무사히 몸을 실었지만, 나는 남편이 집에 들어올 때까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날 밤, 긴박했던 그 날 저녁에 대해 써 놓은 글을 다듬어 이제야 올린다.
지금으로부터 딱 2주 전, 나는 이 시간에도 깨어 있었다.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나는 정말 잠이 많다. 고등학교 시절에도 짝꿍이 기껏 생각해줘서 책상에 엎드려 자는 나를 깨워줘도 오만 인상을 다 쓰며 짜증 냈던 나다. 고마워하기는 커녕..
그런 내가 남편이 출장 비행기에 있는 동안에는 잠을 못 잔다. 자더라도 선잠 들기 일쑤.
올 해로 10년 차에 들어가는 메디컬 디바이스 스타트업 공동창업자이자 CTO인 일개미씨.
남편은 일 년에 최소한 세 번은 최소한 일주일에서 열흘짜리 출장을 간다. 이 회사에서 일한 10년 동안 전반기에는 주로 한국과 일본을 자주 갔었고, 후반기인 2016년부터 구 동독 지역인 예나(Jena)로 일 년에 최소 두 번씩은 다녀온다.
나 귀양 갔다 올게
처음엔 나름 유럽으로 출장 간다며 신나 했었던 그였다. 한데 어느 순간부터 이 출장이 ‘귀양살이'로 바뀌었다. 회사 실험실-호텔-식당만을 왔다 갔다 하는 데다 실험이 길어지면 그마저도 실험실로 식사를 시켜먹으니 사육되는 기분이라고. 놀고 싶어도 놀 거리가 없단다.
그런 곳을 2019년 작년 한 해에만 세 번 갔었다. 11월 한 달 동안에 무려 두 번을 왔다 갔기 때문에 집에서 잔 날보다 독일에서 머문 날들이 더 많았다.
11월 첫 번째 출장에도 약간의 에피소드가 있었는데, 독일에 가 있는 동안 루프트 한자 승무원들이 48시간 시한부 파업에 들어간 것. 그래서 원래 타고 오기로 예약되어 있던 남편의 비행 스케줄 전 두 편이 취소되었다. 만약 승무원들의 파업이 연장된다면 남편이 타고 올 비행기도 취소되는 상황
나는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서 유럽 출장은 가능한 EU 회원국의 국적 항공사를 이용하도록 스케줄을 짠다. EU261 규정 (Regulation No 261 / 2004 혹은 EC 261/04)에 의거해 항공기의 연착, 취소 등에 대해 보상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비행 편 취소 가능성이 높아지자 남편에게 루프트한자 측에 어떤 부분에 도움을 받을 수 있는지, 혹은 받을 수 없는지 알아보게 하고, 나는 EU 261 규정을 꼼꼼히 체크했다.
시간이 돈인 스타트업 CTO에게 있어 예상치 못한 이유로 스케줄이 늦어진다면, 이로 인해 조정해야 할 스케줄이 한 두 개가 아닐 것이다. 남편의 스케줄표는 미팅과 업무, 그리고 아이들 관련 스케줄로 꽉 차 있다. 이를 재조정하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칠 터, 이에 대한 보상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는 남편 대신 내가 체크해서 우리가 요구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알아놔야 챙겨 받아야 할 우리의 권리를 최대한 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행자 보험이 있는 카드들을 연회비가 비싸도 유지하고 이 카드로 출장 항공료와 호텔비를 결제한다. 보통 이런 카드들은 라운지를 쓸 수 있는 혜택이 따라오고 비싼 연회비를 상쇄할만한 혜택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혜택을 쓰기 위해 필요 없는 여행을 한다면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결과를 초래하겠지만, 예상되는 출장 횟수가 대강 나와 있으니 혜택을 최대한으로 받을 수 있는 방법들을 선택할 수 있다. 라운지는 출장러에게 없어서는 안 될 오아시스 같은 것이다. 우리 일개미씨도 라운지 이용이 자유로워지자, 출장의 질이 높아졌다며 행복해했다.
지금이야 회사가 어느 정도 안정적인 상황이라 이런 불가피한 상황에 대해 돈 걱정을 안 하고 대처할 수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지!
투자받기 전 미 정부 지원금만으로 회사를 운영했던 빠듯했던 시기엔 출장이라도 갈라치면 온갖 비용을 줄이기 위해 쥐어짜야만 했었다. 호텔 대신 에어비앤비를 썼고, 택시비를 줄이기 위해 우리 일개미씨는 종종 출장 가방을 밀며 걸어 다녔다. 관광도 할 겸. 피치 못하게 우버를 이용할 때는 합승 요금인 우버 풀 서비스를 선택했고, 그래서 보스턴 외곽의 에어비앤비를 찾아가다가 기사가 숙소 부근에 떨렁 내려놓고 가 버리는 통에 초행길에 에어비앤비 숙소를 찾느라 땀을 뻘뻘 흘린 적도 있었다. 미국 대도시 외곽이 얼마나 우범지대가 많은데.. 그 이야기를 듣고 나도 무척 놀랐고, 웬만하면 출장 가서는 목적지 앞까지 데려다주는 서비스로 선택하라고 신신당부한 적도 있다.
항공료도 줄여야 하니 가격 상한선을 정해 놓고 그 미만의 가격대에서 최단 시간에 오는 스케줄을 골랐다. 어차피 비즈니스 타고 가는 것이 아니니 이왕이면 비행기라도 새 거 타고, 좌석이 1인치라도 넓은 거 타고 가라고 기재 체크하고, 루트 체크해서 호텔 혹은 에어비앤비 선정까지 다 내가 했는데, 어느 날엔가 남편이 이제 회사에서 출장 관련 전담팀이 있으니 더는 내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한다. 그 후로 이 팀을 통해 출장을 한 번 다녀오더니 그냥 예전처럼 나보고 하란다. 출장이 너무 힘들었다며.. 와이프가 꼼꼼하게 챙겨서 정해주는 출장 스케줄이 별 게 아닌 게 아니었던 거다.
다시 루프트 한자 승무원 파업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결국 파업은 48시간 이후 연장되지 않았고, 일개미씨의 항공편은 취소되지 않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다.
허나 이 소동은 2주 전 갔었던 출장의 서막에 불과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