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10년 전에 글로벌 탑 통신장비 기업으로 발돋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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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립 초기, 보따리상
화웨이 초창기에는 정확한 발전 방향 자체가 없었고 그저 무역을 위주로 하는 보따리상에 불과했다. 80년대 갓 개혁개방을 시작한 촌구석에 불과했던 선전은 주로 홍콩과의 교역, 홍콩의 투자를 자양분으로 성장 중이었기 때문에 선전에 자리 잡은 화웨이 역시 홍콩에서 제품을 들여와서 중국에 되파는 일을 주로 했다.
통신장비, 화재경보기는 물론이고 온갖 식품 등 잡화까지 차익을 남길 수 있는 것은 몽땅 떼다가 팔았다. 그러다가 홍콩 홍니엔(鸿年)의 소형 전화교환기를 대리해서 중국에 파는 것으로 시작으로 처음으로 큰 수입을 올리기 시작한다.
여기서부터 본격적으로 화웨이의 통신장비 드라마의 서장이 펼쳐진다. 사실 대리상으로서의 매출은 주로 인맥 네트워크, 가격 그리고 각종 사후 서비스가 결정하므로 별로 기술력이 많이 들어가는 부분은 아니었다. 당시 화웨이는 전화교환기 대리 시장에서 승승장구하며 점점 높은 점유율을 차지하게 되지만 오히려 업계에서는 화웨이가 다해먹는 다고 생각해서 오히려 물량을 받지 못하는 예상 밖의 위기가 찾아온 것이다. 그래서 물량 확보를 위해서 울며겨자먹기식으로 예전보다 훨씬 비싼 값으로 구입해서 기존 구매를 계약한 고객들에게 공급하는 일련의 사건들이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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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교환기 직접 생산
이런 외부 상황으로 인해서 런정페이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직접 전화교환기를 만드는 것으로 기업 방향을 틀어버린다. 지금 와서는 이미 너무 커져버린 화웨이를 살짝 미화하는 차원에서 단순 대리상에 머물고 싶지 않았던 런정페이가 통신장비 관련 자주적 기술개발에 나선 것이라고 포장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런정페이는 실제 인터뷰에서는 자신은 처음에 이 통신장비 분야가 얼마나 험난한 길이었는지 모른체 멋도 모르고 뛰어 들었으며 다시 돌이키려고 해도 이미 연구개발에 돈을 다 써버려서 되돌아 갈 수 없었다고 회고한다.
그렇게 배수의 진을 쳤지만 당시에는 그것이 전혀 낭만적이지도, 멋진 일도 아니었으며 단지 생존을 위해 부득불 그렇게 했다고 말했다. (실제 런정페이의 표현은 逼上梁山, 소설 ‘수호지'의 여러 영웅호걸들이 여러 상황으로 인해 송나라 관군을 비해 어쩔 수 없이 양산으로 쫓겨 들어가서 반란 집단이 된 것을 표현)
결국 런정페이는 교환기 대리상으로 벌어들인 거의 모든 자금을 투입하여 1990년 자동으로 전화 연결해주는 교환기인 PBX(Private Branch Exchange) 자체 개발하고, 1991년 SPC(Stored Program Control)교환기 개발에 착수하여 첫 상용화에 성공한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기술개발에 성공하지만 사실 런정페이가 인정한대로 화웨이 같이 작은 기업이 통신장비를 직접 개발하겠다고 나선 것은 사실상 ‘계란으로 바위치기’와도 같은 무모한 도전이었다.
화웨이에겐 기술개발이었겠지만 글로벌 통신장비 입장에서 봤을 때 순전히 자신들의 제품을 뜯어다가 조잡하게 모방한 수준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길로 들어선 런정페이는 특유의 뚝심과 집념으로 고난의 행군을 계속하며 SPC 교환기에 이어서 디지털 프로그램 제어 교환기 개발에 비용과 인력 투입을 올인한다.
대략 이 때부터 화웨이의 독창적인 문화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야전침대 문화였다. 연구개발에 매달리다가 지쳐쓰러지면 잠깐 눈을 붙이고 다시 자리로 돌아와서 일을 시작하는 그런 빡센 문화였다. 런정페이는 다른 사람들이 이런 야전침대 문화를 전근대적인 기업문화라고 비난해도 별 신경 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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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내수시장 공략
1992년 첫 자체 통신장비 제품을 생산하기 시작한 화웨이는 3~5선의 지방 도시과 농촌 지역을 먼저 공략하고 중국 연안의 1, 2선 도시를 나중에 진출하는 마케팅 전략을 세웠다.
이는 중국어로 '农村包围城市'라는 고전적인 전략이다. 과거 신중국 설립 이전 공산당의 마오저둥이 국민당의 장제스의 많은 병력과 우수한 화력을 극복하기 위해서 중국 내에서 내륙 수 천 킬로를 도는 대장정을 하면서 국민당에 대한 게릴라전을 펼침과 동시에 각 농촌 지역을 공산당의 영향력 아래 두면서 지속적으로 병력을 보충했고 결국 이를 통해서 국민당을 몰아낼 수 있었다.
이런 군사적인 전략 외에 시장 공략에 있어서도 중국은 워낙 넓다보니 대도시과 주요 거점보다 지방 도시와 농촌 지역을 먼저 공략한 해서 거점을 마련한 후에 다시 대도시를 공략하는 마케팅 전략을 지칭하기도 한다. 수많은 중국 기업들이 이 전략을 여전히 애용하고 있다. 앞으로 다룰 기업들도 이 전략에 의존한 기업들이 많다.
당시 중국 농촌은 개혁개방 정책으로 인한 경제발전으로 유선 전화 수요가 크게 증가했고 이로 인해 인한 통신장비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 중에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5선 도시와 농촌 지역에는 기존에 중국 1, 2선 도시 위주로 진출한 글로벌 통신장비 기업들의 영향력이 많이 닿지 않고 있었다. 이렇게 화웨이는 농촌 지역 공략에 공을 들였고 그 과정에서 사업 경험을 쌓고 실제 통신 네트워크 운영 실력과 관련 영업망을 늘려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마침내 1993년 화웨이는 중국인민해방군에 네트워크 장비를 공급하는 계약을 맺었다. 문화대혁명 시절에 반동분자의 아들로 낙인찍혀서 온갖 수난을 받았던 굴레를 벗어버리면서 중국군에 납품하는 애국 기업의 면모와 화웨이의 기술력을 동시에 인정 받을 수 있는 쾌거였다.
이를 계기로 급격하게 몸집을 불린 화웨이에서 런정페이는 기술개발에 대한 중요성을 다시 한 번 강조하면서 1998년 '화웨이 기본법’을 만들고 매출의 10% 이상을 연구개발에 투자한다는 것을 명문화시킨다.
1995년에 화웨이는 통신장비 분야 발전 전략을 ‘자주혁신을 통한 첨단기술 개발’로 정하고 당시의 통신기술인 3G에 대한 특허와 기술에 대한 연구개발에 많은 역량을 투입한다. 그 결과 불과 10년도 안되는 기간 동안 1999년 에릭슨, 노키아 등 쟁쟁한 글로벌 통신장비 기업들을 제치고 중국 통신장비 점유율 1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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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진출 및 화웨이로 인한 통신장비 업계 지각변동
중국 내수시장에서 자신감을 얻은 화웨이는 1997년부터 해외 시장 공략에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한다. 기술력과 영업망, 그리고 해외 통신장비 운영경험으로 따지면 여전히 글로벌 선도 기업들에게는 한참 못 미쳤던 화웨이는 내수 시장 공략 방법과 유사하게 신흥 시장부터 진출을 모색한다.
그리하여 1998년부터 화웨이는 동남아, 아프리카, 중동, 인도 그리고 남미 등의 신흥국의 통신장비 시장에 본격 진출한다. 물론 이 과정에서 중국 정부는 화웨이가 글로벌 시장에 진출할 수 있도록 많은 보조금과 다양한 세금 혜택을 부여했다. 상대적으로 낮은 기술력, 글로벌 네트워크 운영 경험 미숙과 열악했던 통신장비 품질은 미국, 유럽 통신장비 기업의 거의 절반에 가까운 저렴한 가격과 공격적인 마케팅으로 극복했다. 신흥 시장을 공략 한 후 2001년부터는 선진국 시장인 유럽, 2003년부터는 미국 시장까지 진출한다.
저렴한 가격 외에 화웨이가 추구했던 공격적인 마케팅이란 해외 영업팀에서 각 국의 주요 통신업체들을 찾아다니면서 통신장비 신뢰성 확보를 위한 무료 테스트 베드 설치, 일정기간 운영 및 유지 보수에 대한 무료 제공과 빠른 서비스 피드백을 위해 화웨이의 유지보수 인력을 현지에 상주시키는 조건 등 이었다. 이런 파격적인 조건으로 실제로 여러 통신업체들이 화웨이의 통신 네트워트를 시범 운영을 해본 후에 문제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구매 계약을 체결했다.
이런 식의 글로벌 시장 공략과 꾸준한 연구개발을 거쳐서 2012년에 에릭슨을 누르고 화웨이는 마침내 세계 최대의 통신장비 기업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화웨이는 기존의 통신장비 시장의 생태계를 강제로 구조조정 시킨 미꾸라지 어항의 포식자인 메기 같은 존재였다.
2000~2010년 사이의 3G 통신망 보급 시절만 하더라도
- 알카텔(1872년),
- 루슨트(1870년),
- 지멘스(1865년),
- 노키아(1865),
- 모토로라(1928),
- 에릭슨(1876년),
- 말코니(1998년),
- 노텔(1895년) 등
짧게는 10년, 길게는 150년 이상의 오랜 업력을 자랑하는 미국과 유럽의 글로벌 통신장비 기업들이 즐비했으나 화웨이가 기술, 가격 경쟁력을 바탕으로 급격하게 성장하자, 전통의 강호들이 설 자리를 잃게 되고 부득불 서로 인수합병을 거듭했다. 결국 알카텔, 루슨트, 지멘스, 모토롤라 등이 노키아로 합병됐고, 노텔과 말코니 등이 에릭슨으로 합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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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G 통신장비 주도기업으로 성장
화웨이의 무서운 점은 단지 유선 통신장비를 비롯한 무선 이동통신 장비에 해당하는 기지국(Radio Unit), 스몰셀 기지국(Small Cell Base Station), 중계기(Repeater), EPC(Evolved Packet Core, 교환국)을 자체적으로 제조, 운영 및 유지보수 할 뿐 아니라 이와 관련된 통신 관련 특허, 반도체(칩셋) 기술과 더불어 스마트폰 기술까지 가지고 있는 기업이라는 것이다. 이런 통합적인 능력으로 각 통신사업자의 요구에 맞춰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까지 모두 한꺼번에 제공할 수 있다.
이와 같은 통신장비 관련 전방위적 능력은 화웨이 외에는 다행스럽게 한국의 삼성 밖에는 보유하고 있지 않다. 현재 화웨이의 5G 통신장비 분야의 최대 경쟁자인 노키아와 에릭스 모두 반도체(칩셋)과 스마트폰 분야의 기술을 가지고 있지 않다.
삼성과 화웨이, 양자의 차이점이 있다면
- 5G 이동통신장비 분야에서는 기술력과 시장 점유율에서 화웨이가 삼성을 압도하고 있고,
- 반도체 분야에서는 반대로 삼성이 화웨이를 압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화웨이는 이미 2019년 기준으로 5G 통신장비 기술력에서는 12~18개월 이상 삼성전자를 앞서있다고 판단하고 있다. 저우웨펑(周跃峰) 화웨이 무선네트워크부문 마케팅 부사장의 말이다. 근거없는 자신감이 아니라 실제로 5G 통신장비시장에서는 삼성전자가 화웨이를 목표로 하고 있는 실정이다.
지금의 위기는 차치하고, 지난 30년 동안 화웨이는 한국 주요 통신사를 포함한 전 세계 여러 통신사들과 함께 세계 1,500 여 개의 통신망을 구축했고, 30억명이 넘는 인구를 유무선 통신망과 인터넷으로 연결했다. 이런 수치에서 알 수 있듯이 화웨이는 과거 2G, 3G의 통신기술 발전 경로에서 한참 뒤쳐진 후발주자에서 4G 시대부터 점차 선두 그룹으로 치고 올라왔으며 5G 시대에서는 의심할 수 없는 선도 기업으로 자리하고 있다.
보고도, 듣고도 믿기 어려운 화웨이의 초고속 성장 과정에서 미국 시스코 등 여러 통신장비 기업들은 화웨이의 불법적인 기술 탈취에 대해서 의심하고 미국 정부 역시 여러 차례 화웨이에 대해 미국의 안보에 위협이 된다고 지목 한 바 있다. 실제로 미국은 이미 화웨이를 신뢰할 수 없는 통신장비 업체로 명시적으로 규정하고 화웨이가 만든 통신장비는 미국과 동맹국의 안보에 위협이 되므로 미국와 일부 유럽의 5G 통신망 구축사업에 화웨이를 일절 배제시키도록 조치하고 있다. 영국의 경우는 이미 설치된 화웨이 통신장비는 2027년까지 철거토록 정부차원의 명령이 떨어진 상황이다.
이에 따라 5G 수요는 전 세계적으로 크게 증가하고 있는데 에릭슨과 노키아, 삼성과 일부 일본 기업들이 반사이익을 보는 상황이 되었다.
미국의 반도체 수출 금지조치로 인해서 연간 출하량이 억 단위인 스마트폰 분야와 달리 5G 통신장비 출하량은 연간 만 단위에 불과하므로 사전에 미리 확보한 반도체로 향후 2~3년간 버티는데 큰 문제는 없다고 하지만 이 같은 상황이 계속된다면 화웨이의 통신장비 세계 1위 자리도 어떻게 될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