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6.07
주일에 교회를 가기 위해 공항철도를 탔다. 역으로 지하철을 타러 가는데 날씨가 매우 더웠다. 당장이라도 나의 호흡을 막고 있는 마스크를 집어던지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대한민국에서 제공하는 기본적인 교육을 받은 사람이기에 참았다. 코로나로부터 나를, 그리고 다른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그리고 승강장에 서서 에어컨으로 시원해진 열차가 빨리 들어오길 기다렸다.
열차가 도착하고 문이 열렸을 때, 예상대로 시원한 바람을 느낄 수 있었다. 열차 기사님도 나처럼 마스크를 집어던지고 싶으셨는지 에어컨을 강력하게 틀어주셨다. 게다가 앉을 자리도 여유로워 편하게 앉아 갈 수 있었다. 어찌나 감사하던지. 자리에 앉아 숨을 돌리며 더위를 식혔다. 그리고 맬론의 재생 리스트를 바꿨다. 가요가 가득한 리스트에서 팝송 리스트로.
책을 읽으려는 준비다. '무슨 책을 읽는데 노래를 팝송으로 바꾸냐, 허세 장난 아니네'라고 생각했다면 죄송하지만 아니다. 허세가 아니라 내가 모자라서 그렇다. 부족한 뇌의 역량으로 한국어를 읽으면서 한국 노래를 들으면 읽는 내용을 정확히 이해하기가 어렵다. 책에 쓰인 내용보다 노래 가사가 더 귀에 직접적으로 들어오기 때문에 책에 집중하기가 어렵다는 걸 느꼈다. 그때부터 들어도 이해하지 못하는 팝송을 들으며 책을 읽기 시작했다. 영국은 어떻게 다녀왔을까 하는 의문의 드는 상황이다.
그렇게 팝송 리스트에서 Surfaces의 Good Day를 틀고 랜덤 재생을 설정했다. 그리고 핸드폰을 에코백에 넣고 책을 꺼냈다. 책은 배우 박정민의 ‘쓸 만한 사람들’. 여담이지만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글에서 박정민이란 배우가 어떤 배우인지 그대로 나타난다. 그리고 무엇보다 글을 참 잘 쓴다. 어쨌든 그렇게 준비를 다 끝내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모처럼 지하철에서 책에 집중을 했다. 정말 모처럼이라는 말이 정확하다. ‘마지막으로 지하철에서 책을 읽은 날이 언제일까’라는 생각을 할 수도 없을 정도로 오랜만이었다.
그러다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책을 읽은 지 15분 만에 가방 안에서 울리는 진동을 느꼈다. 아차 싶었다. 책을 읽기 위해 준비해야 하는 것들 중 하나를 빼먹었다. 바로 무음 설정. 첫 진동 이후, 별 내용이 아닐 거라고 합리화를 한 나의 마음과 다르게 진동은 여러 차례 울렸다. 책은 재미있었지만 자꾸 울리는 진동의 유혹에 내적 갈등이 일어났다. ‘카톡인가? 아님 인스타그램 DM? 노래는 멈추지 않았으니까 코로나 재난 문자는 아닐 텐데, 뭘까?’ 그리고 타협했다. 이번 한 번만 확인하고 다시 책을 읽기로.
결국 책을 잠시 덮고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진동의 주범은 영국에서 같이 공부한 친구들이었다. 한국에 돌아와 아직 한 번도 못 만나서 드디어 날을 잡기로 했다. 독서를 방해한 원인만 확인하고 다시 책을 읽겠다는 의지는 진작에 사라졌다. 만나서 놀자는 내용에 박정민 배우님께는 죄송하지만 모처럼 집중한 책을 무릎에 두고, 그 위에 스마트폰과 손을 올려 두며 친절하게 답장을 했다. 이보다 친절할 수는 없었다.
약속을 다 잡은 후 ‘그래, 다음 주에도 바쁘겠네. 신난다’라는 생각과 함께 핸드폰을 다시 가방에 넣었다. 그리고 독서를 위해 다시 자세를 고치며 고개를 들었을 때 갑자기 ‘같은 칸에 있는 다른 사람들은 뭐를 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큰일 났다. 모처럼 발휘된 집중력이 사라졌다. 이 정도면 집중력이 발휘됐다고 하기도 어려운 수준 아닌가. 그리고 목적지인 서울역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확인했다. 도착까지 남은 시간은 10분 정도. 그 순간 또 한 번의 결심을 했다. 남은 시간은 갑자기 든 생각에 쿵짝을 맞춰주기로. 그렇게 사람 관찰이 시작됐다.
역시 대부분의 주도권은 스마트폰이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활용법은 다양했다. 내 맞은편에는 영상을 보는 사람이 있었고, 대각선에 앉은 학생은 게임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뭘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손가락이 스마트폰 액정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스마트폰에서 벗어난 몇몇 사람도 있었다. 열차 입구에 서서 복잡한 서울의 노선도를 보는 사람, 화장을 하는 사람, 책을 읽는 사람, 내 옆 자리에서 아이패드로 시험공부를 하는 학생까지. 아이패드는 스마트폰과 다른 느낌이라 나름 분류를 했다. 개취 존중 바란다. 그리고 책을 읽다가 놀 약속을 잡고, 사람들을 구경하다 핸드폰 메모장에 끄적거리는 놈도 있다.
모두가 무엇인가를 한다. 출입문 8개가 있는 열차 한 칸 안에서 많은 일이 발생한다. 그리고 그 일이 일어나는 시간 또한 제각각이다. 한 정거장만 가는 사람도 있고 두 정거장을 가는 사람도 있고, 종점까지 가는 사람도 있다. 각자에게 주어진 열차에서의 시간이 스스로를 위해 사용된다. 돌이켜 보면 이러한 작은 시간들은 예상 못한 결실로 이루어진다. 훗날 내가 책을 쓴다면 지금 말하고 있는 책의 한 부분도 11시 15분에 탄 공항철도 안에서 쓰인 것이다. 열차를 타고 내릴 때까지 40여분의 시간이 한 챕터를 만들어냈다.
나처럼 책 읽고 카톡 하고 사람 관찰하고 글도 쓰라는 건 당연히 아니다. 각자의 일의 가치와 성과는 모두 다르다. 열차 안에서 게임을 한 사람은 레벨을 올리거나 다음 단계로 넘어가 재미와 성취감을 얻었을 것이다. 얼마나 뿌듯한 일인가. 영상을 본 사람 또한 그 시간이 즐거웠을 것이다. 화장을 한 사람은 그 시간을 통해 아름다워졌다. 또 혹시나 썸 타는 사람과 카톡을 하고 있던 사람은 그 연락의 순간이 연애로 이루어질 수 있다. 이건 조금 부럽다.
아무튼 그렇게 우리는 매 순간 알게 모르게 열심히 결과물을 생산하며 살아간다. 잠에서 깬 순간부터 다시 침대에 눕기까지 행한 모든 것을 기록해보면 각자의 활동량은 ‘해버지’ 박지성 선수의 전성기 시절 저리 가라 수준일 것이다. 모든 순간은 의미가 있고 인생의 자양분이 된다. 우리는 하루를 꽤 열심히 보낸다. 그러니 오늘 하루도 고생한 스스로에게 박수를 쳐주자.
그리고 생각한다.
내일은 나도 썸녀랑 카톡 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