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화통 주의보
경만 씨는 누구보다 의협심이 강한 사람이다.
그는 정직했으며 거짓보다 진실을 추구하는 이 시대에 있어 반드시 필요한 사람이다. 경만 씨는 요즘 화가 늘었다. 어지간하면 부르고 싶지 않은데 수시로 찾아들어와 앉는 통에 아주 열불이 난다. 혹자는 이런 말도 했었다.
"보는 것이 남는 것이다"
"많이 보고 많이 남겨야 삶이 즐겁다"
요즘은 다르다. 보다 보면 열불이 난다. 속이 뻔한 거짓을 말하면서도 얼굴 표정은 허무맹랑하다. 포커페이스가 무성하다. 눈앞에 증거물을 들이대야 짐짓 찔렸다는 엄살을
시전 한다. 이 정도의 스킬은 정작 배웠다는 엘리트요 지식인들의 전유물로 전락한 지 오래다. 리더십들의 양심을 노래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애시당초 저만치 바다건너로 사라졌다. 양심에 수북한 털이 보기에도 역겹다.
성능 좋은 면도기를 들이대도 순식간에 그날도 무뎌지고 말 것이라는 우려와 걱정이다. 차라리 이럴 바엔 사회적인 비용이 필요 없다. 기껏 배우고 공을 들이면 무얼 하겠는가?
무식해도 공정하며 솔직하고 투명한 것이 좋다. 자고로 지금의 현실은 자칭 똑똑한 사람들이 다 망쳐놓고 있는 중이다. 대한민국이 심히 걱정스럽고 위태롭다. 대한민국의
큰 기둥 대통령부터 판사, 검사, 의사, 변호사, 국회의원... 누구 하나 투명해서 속을 다 내놓고 침을 튀기는 선량인이 없다. 그러니 경만 씨 속으로 파고드는 화는 곧바로 울화통이 되어 터지기 일보직전까지 가는 것이다. 경만 씨가 들여다보던 TV를 껐다. TV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누가 참이고 누가 거짓인 지 구분을 못하겠다. 의례 떳떳한 사람만이 큰 소리를 칠 수 있고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움츠리고 찌그러져 있어야 맞는 얘기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다. 무조건 언성을 높인다. 다들 잘못한 게 없나 보다. 끌끌거리며 혀를 차다가 밖으로 나온 경만 씨가 전철에 올랐다. 생일이 늦어 한발 늦게 퇴직자의 반열에 들어선 친구를 만나기로 했다. 그렇게라도 해야 속의 울분을 내쫓을 수가 있을 것 같았다. 머릿속에 잔뜩 들어찬 울분을 밀어내고 희뿌연 막걸리를 주입시켰다. 신김치에 올라앉은 보드라운 두부의 질감이 성질머리 돋아난 혓바닥 위에서 녹아내리는 중이다. 꿀떡꿀떡 안으로 흐르던 가상의 막걸리가 경만 씨의 뒷문을 두드려댄다.
'안된다! 지금은 달리고 있는 중이잖니?'
'조금만 참아라, 이번 역에서 일단 내리도록 할게'
열어주고 싶은 욕구를 꾹꾹 눌러가며 두드리는 소리를 삼켰다. 눈이 번쩍거리는 화살표를 쫒고 있는 사이 꾸물거리던 몸은 간결함을 갖춘 채 열리는 문 앞에서 큐싸인을 기다렸다. 안내방송이 스피커를 통해 기어 나오려는 순간보다 빠르게 경만 씨가 움직였다. 유독 남과 여가 무표정하게 나란히 서 있는 그림판을 집중해서 찾고 또 찾았다. 뒷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잦아졌다. 열어주고 싶은 욕구가 먼저 가서 기다린다.
경만 씨가 입성에 성공했다. 나와서는 안될 식은땀도 흐른다. 한숨을 돌리자 보이지 않았던 주변이 눈에 들어온다.
'어라! 누군가 핸드폰을 놔두고 갔나 보다'
보통의 남성용은 본체케이스에 카드수납하나정도 추가가 기본인데 갑자기 눈에 띈 요것은 수납형이라고 해야 할까 여하튼 제법 묵직했다. 케이스를 열고 궁금한 핸드폰을 터치해 보지만 패스워드에 가려진 얼굴을 보기는 힘들었다.
'에이 뭘 알아야 주인을 찾아줄 텐데'
뒷문도 활짝 열어젖혔고 열어주고픈 욕구도 충만해졌기에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리고는 얼핏 놔두고 간 핸드폰에 시선을 묻혀보았다.
'그냥 놔두고 가는 게 맞겠지?'
문을 나서는데 그 전화에서 벨소리가 울린다.
"여보세요? 아 네~ 이 폰 주인이신가요?"
"음 여기는 지하철역 화장실인데요"
"아 이쪽으로 오신다고요? 그럼 여기 역에 맡겨 놓겠습니다 "
경만 씨가 바빠졌다. 친구와의 약속시간이 가깝다. 서둘러 핸드폰을 역무원사무실에 맡기고 자리를 떴다.
비도 안 오는데 친구와 함께 파전에 막걸리다. 파전에 좀 전에 있었던 해프닝을 씹으며 들이키는 막걸리가 걸쭉하다. 뿌옇게 막걸리의 농도가 짙어질 즈음에 전화벨이 울린다.
"여보세요? 네? 아 네 그 그럴 리가요, 아닌데요"
좀 전에 맡겨둔 핸드폰의 주인이 나타났는데 수납케이스에 있어야 할 돈과 카드가 없어졌다고 난리를 친다고 한다.
다시 와서 해명을 하라고 한다.
성이 구가요 이름이 경만 씨 <구경만>씨가 물건의 주인을 찾아주려고 선의를 베풀었다가 없는 보따리를 내놓으라는
억지스러움에 또다시 올라오는 화를 감당키 어려워졌다.
이름대로 <구경만>하고 말 것을 그랬나 후회막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