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도 책상 앞에 앉았고,
책은 펴졌고
도면은 켜졌다.
그런데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머릿속은 멍하고,
손은 가만히 멈춰 있고,
눈은 글자를 읽지만
한 줄도 이해되지 않았다.
그게 슬럼프였다.
아무 전조도 없이
조용하게 찾아와 모든 걸 멈추게 했다.
사실 예상은 하고 있었다.
학위까지 마치고, 자격증 재도전도 결심했으니
기세 좋게 달릴 줄 알았다.
작년보다 잘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속도가 붙을수록 자꾸 나 자신이 미워졌다.
이 문제를 왜 또 틀리지?
왜 아직도 도면 속 공간감을 못 잡지?
나는 정말 설계자로 살아갈 수 있을까?
결국 나는
공부를 멈추기 시작했다.
하루, 이틀, 사흘…
자꾸 ‘내일 하자’고 미뤘고,
어느 순간은 ‘그냥 이쯤에서 포기할까’라는 말이 진짜처럼 느껴졌다.
슬럼프는 게으름이 아니었다.
그건 자기 확신이 바닥난 상태였다.
열심히 해도 부족하다고 느끼고,
조금만 실수해도 자격이 없다고 여기는 마음.
나는 어느 순간부터
건축이 하고 싶다기보다
“버텨야 할 것”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그게 가장 아팠다.
어느 날 밤이었다.
평소처럼 도면 연습을 하려다
툭, 연필을 내려놓고
내가 뭘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고,
잘하고 있는지도 모르겠고,
그냥 너무 막막했다.
그 밤에
나는 나도 모르게 울고 있었다.
소리 내서 울지는 않았지만
속으로 계속 중얼거렸다.
“나 왜 이러지, 나 왜 이렇게 약하지…”
그날 이후
한동안 도면을 켜지 않았다.
며칠을 쉰 뒤
나는 아무 목표 없이 도면 하나를 그려봤다.
시험 준비도 아니고,
실습 과제도 아니고,
그냥…
창문 하나 있는 작은 방을 상상하며 선을 그었다.
그런데 그게 이상하게 편했다.
‘이걸로 뭘 얻어야 한다’는 생각 없이
그저 ‘이걸 그리고 싶다’는 감정만으로 그린 도면.
그때 깨달았다.
슬럼프에서 나를 다시 꺼낸 건,
의지나 성취가 아니라 ‘즐기고 싶은 감각’이었다.
지금도 불안하다.
시험이 얼마 남지 않았고,
내가 준비가 된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건 하나 있다.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한동안 멀어졌던
‘공간을 그리고 싶은 마음’이 다시 돌아왔다.
이 감각이 있는 한,
나는 계속 설계할 수 있을 거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