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움이 채움이 되는 순간

by 언젠간 지을 집

요즘 나는 자주 멈춘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도면도 펜도 내려놓고

한참 동안 아무것도 보지 않는다.


그 시간이 처음엔 낭비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멈춤 속에서 새로운 선이 생겼다.




멈춤은 비겁함이 아니라 용기다


한때 나는 쉬는 걸 두려워했다.


계속 움직이지 않으면 뒤처질 것 같았고,

손을 멈추는 순간

모든 게 무너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건축을 배우며 알게 됐다.

건물도 ‘하중’을 버티기 위해선

균형을 위한 여백의 구조가 필요하다는 걸.


비워야 힘이 흐르고,

멈춰야 다음을 세울 수 있다.


삶도 마찬가지였다.

채우기보다 버텨야 할 때가 있고

달리기보다 멈춰 서야 보이는 길이 있다.




공간이 나를 닮아간다


내 방 한쪽에는 작은 선반이 있다.

책도, 장식도, 아무것도 올리지 않았다.


그저 비워둔 그 공간이

어느 날엔 햇살로, 또 어느 날엔 그림자로 채워진다.


그걸 보고 있으면

마치 내 마음 한켠을 들여다보는 느낌이 든다.


무언가를 계속 쌓지 않아도,

이미 충분히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조용히 일깨워주는 자리.




비움이 주는 자유


건축의 세계에서 완벽함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건물은 조금씩 틀어지고,

빛과 그림자에 따라 다른 얼굴을 가진다.


나는 그 불완전함이 좋다.

삶도 마찬가지니까.


모든 걸 계획대로 짓지 않아도 괜찮고,

때로는 흠이 공간을 더 인간적으로 만든다.


완벽하지 않아도,

충분히 아름답다.



결국, 건축은 살아 있는 철학이다.


내가 건축을 배우며 얻은 건 기술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였다.


공간을 짓는 일은 결국 나를 짓는 일이었다.


벽을 세우듯 신념을 세우고, 창을 내듯 세상과 소통하며,

가끔은 무너진 벽 위에 다시 희망을 올려야 했다.


그래서 나는 이제 안다.

건축이란 건물의 언어가 아니라,

삶을 살아내는 방법의 은유라는 걸.

작가의 이전글여백, 비워야 채워지는 공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