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인도에서의 'No problem'
문화적인 이해로 손해 보는 일 없어야
'No problem'은 인도를 여행하며 가장 많이 들은 표현 중 하나다. 이를 한국어로 번역하면 ‘괜찮아요’ 또는 ‘문제없어요’라는 뜻에 가깝다. 겉으로는 긍정적인 표현처럼 들리지만, 이 말은 단순히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기엔 복잡한 문화적 맥락과 뉘앙스를 지니고 있다. 특히, 인도의 사회적·문화적·역사적 배경을 이해하지 못하면 이 표현을 오해하기 쉽다.
인도에서는 일상적인 대화에서 “No problem”이 자주 사용된다. 사소한 실수나 불편한 상황에서 이 표현을 통해 갈등을 피하려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이는 너그럽고 긍정적인 태도로 보일 수 있지만, 때로는 책임 회피나 현실 도피로도 해석될 수 있다. 심지어 거짓말이나 사기와 같은 곤란한 상황에서도 이 말이 사용되곤 한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No problem”이라고 말하는 태도는 인도의 독특한 문화적 특성을 반영한다.
인도 북부의 성스러운 도시 바라나시를 여행한 적이 있다. 여기서 이 표현의 문화적 의미를 더욱 강하게 느낄 수 있었다. 바라나시는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도시로, 갠지스강 주변에서는 죽음을 앞둔 사람들과 이미 사망한 이들의 유해가 종교적 의식에 따라 강물에 뿌려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는 사후에 더 나은 삶으로 환생한다는 힌두교 신념에 따른 것이다.
놀랍게도, 죽음을 앞둔 사람들의 보호자들은 전혀 슬퍼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울고 있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한 번은 부모를 잃은 한 사람에게 “왜 울지 않느냐”라고 물었더니, 그는 단순히 “No problem”이라고 답했다. 갠지스강변에서 시신을 화장하며 소각이 덜 된 뼈 조각을 강물에 던지는 장면에서도 사람들은 일상처럼 차분한 태도를 유지했다. 이처럼 혼란 속에서도 평온함을 유지하는 모습은 인도 문화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혼돈 속에서 질서와 평온함이 유지된다.
인도의 거리에서는 소똥 냄새가 진동하고, 소, 돼지, 개, 고양이가 도로를 차지한 혼란스러운 풍경이 펼쳐지지만, 사람들은 불평 없이 “No problem”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태도는 단순히 환경에 익숙해졌기 때문만이 아니라, 삶을 받아들이는 그들만의 독특한 관점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
델리에서 열차가 12시간 연착되었던 경험이 그 예다. 안내 방송도 없는 상황에서도 사람들은 놀라울 정도로 침착했다. 항의하려고 철도 사무소를 찾아갔을 때, 직원조차 무심하게 “No problem”이라고 답했다. 대합실에 모인 현지인들 역시 이 상황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바닥에 자리를 깔고 시간을 기다리는 모습은 놀라움을 자아냈다. 우리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러한 태도는 현대 인도인들의 관용적인 성격뿐 아니라, 식민지 시대의 역사적 배경에서 기인한 것일 수도 있다. 200년간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으면서, 인도인들은 강압적이고 가혹한 억압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독특한 생존 전략을 개발해야 했다. 긍정도 부정도 아닌 애매모호한 표현과 태도는 그들의 생존 도구가 되었을 것이다.
한 흥미로운 일화는 중죄인을 처단할 때 “No problem”이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던 맥락에서 비롯된다. 형 집행관이 죄수에게 “너의 죄를 인정하느냐”라고 물으면, 죄수는 “No problem”이라고 답했다. 이는 긍정도 부정도 아닌 대답으로, 형 집행관이 형을 집행할지 보류할지 판단하기 어렵게 만들었다고 한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은 ‘No problem’이라는 표현이 생존과 회피의 도구로 자리 잡게 된 이유를 설명해 준다.
인도인들과의 관계나 거래에서는 이러한 문화적 배경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표현이 항상 진심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갈등을 피하거나 책임을 회피하려는 의도로 사용되기도 한다. 중요한 거래에서 이 표현을 잘못 이해해 손해를 입은 사례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No problem”을 부정적으로만 바라볼 필요는 없다. 인도인들의 이 표현에는 삶을 덜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불확실한 상황에서도 유연하게 대처하는 지혜가 담겨 있다. 우리 역시 이들의 “No problem” 정신을 참고하여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도 차분히 대응하는 법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이 말이 진짜 문제없음을 의미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을 기억하며, 신중하게 대처하는 자세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