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우리 집의 일개미였다. 엄마가 흘린 땀방울 덕분에 오늘의 우리가 이토록 풍요로움을 누리고 있다. 작은 체구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큰 사람, 말 그대로 작은 거인이었다. 키 158cm, 몸무게 55kg의 아담한 몸집에 배우 김지미를 닮았다는 이야기를 들을 만큼 미인이셨다. 하지만 가족을 위해서라면 자신을 돌볼 틈도 없이 언제나 묵묵히 일하셨다.
엄마는 18살이라는 꽃다운 나이에 5대 종손의 집안으로 시집오셨다. 시댁은 평범하지 않았다. 시부모님과 함께 네 명의 어린 시동생을 돌봐야 했고, 그중 막내는 겨우 네 살이었다. 시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신 탓에 엄마는 시동생들에게 사실상 어머니 같은 존재가 되셨다. 밥을 짓고 옷을 손질해 학교에 보내고, 밤에는 밀린 집안일을 마무리하던 엄마의 하루는 늘 새벽부터 시작되었다.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커다란 가마솥에 밥과 국을 준비하던 엄마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 시절 빨래는 손으로 해야 했다. 겨울이면 꽁꽁 언 개울가로 나가 얼음을 깨고 빨래를 하셨다. 손이 얼어붙어 감각을 잃을 만큼 추운 날에도 엄마는 한 번도 힘들다며 불평하지 않으셨다. 어린 나에게는 그 모습이 당연한 일처럼 느껴졌지만, 이제 와서 돌이켜 보면 그것이 얼마나 가슴 아픈 희생이었는지 깨닫게 된다.
엄마는 단지 집안일만 하신 것이 아니었다. 1남 3녀를 키우며 대농 장손집안을 이끌어 가셨다. 집안에서는 명절이나 제사 같은 큰 행사가 끊이지 않았다. 손님이 오면 이웃과 친척들까지 소문난 엄마의 손맛을 즐기기 위해 몰려들었다. 직접 빚은 떡과 장시간 불을 지펴 만든 음식들은 언제나 정성과 사랑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과정에서 밤잠을 설친 날도 부지기수였다.
게다가 엄마는 가정 경제의 책임도 맡으셨다. 논밭과 포도밭을 돌보며 시장에 나가 직접 농산물을 팔기도 하셨다. 농번기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논에서 일하셨다. 농장에는 항상 일꾼들로 북적였고, 엄마는 그들에게 아침, 점심, 세참을 내놓으며 바쁘게 움직이셨다. 그렇게 집안 살림과 농사일을 병행하시며 정말로 철인 같고, 슈퍼우먼 같으셨다. 아버지가 외부 활동으로 바빠 가정사에 소홀했기 때문에 엄마는 사실상 가정의 기둥이자 경제적 중심이었다.
엄마의 사랑은 특히 자식들에게 깊었다. 사위가 집에 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씨암탉을 잡아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음식을 차리셨다. 그 음식들은 모두 아궁이에서 정성껏 만든 것들이었다. 손주들에게도 항상 건강에 좋은 음식을 챙기셨고, 가족의 건강과 행복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셨다.
엄마의 삶은 정말로 일개미 같았다. 일개미는 집단생활을 하며 여왕개미를 위해 일생을 바친다. 하지만 우리 엄마는 가족을 위해 일개미와 여왕개미의 역할을 모두 해내셨다. 몸이 부서져라 일하면서도 결코 자신의 고단함을 드러내지 않으셨다. 매일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쉬지 않고 일하며 가족을 위해 헌신하셨다. 그러나 그렇게 몸을 아끼지 않으신 탓에 결국 중병을 얻으셨고, 가족 곁을 떠나고 말았다.
엄마가 떠난 뒤, 그 빈자리는 말로 다할 수 없을 만큼 컸다. 엄마가 계셨기에 유지되던 일상은 혼란스러워졌고, 우리 가족은 엄마의 부재를 뼈저리게 느꼈다. 하지만 엄마가 남긴 사랑과 헌신의 기억은 우리에게 깊은 울림으로 남아 있다.
일개미는 자신의 몸무게보다 몇 배나 무거운 짐을 지고도 공동체를 위해 묵묵히 희생한다. 엄마도 러셨다. 한 푼 두 푼 아껴 자식에게 모두를 내어 주셨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헌신과 사랑의 가치를 가르쳐 주셨다. 그 가치는 우리 가족이 앞으로도 지켜야 할 소중한 유산이다.
우리 엄마 같은 일개미는 특별하다.
그런 엄마가 있었기에 우리 가족은 여전히 하나로 묶여 있다. 엄마의 삶을 되새길 때마다 가슴이 저릿하지만, 그 사랑은 앞으로도 우리 가정의 뿌리가 되어 평생 이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