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양통신 13

by 김치호

대나무숲을 지나면 바로 지리산 둘레길


집 옆으로 흐르는 계곡을 건너고 대숲을 지나면 바로 지리산 둘레길입니다.


하동군 악양면 대축리와 화개면 부춘리를 연결하는 8.5km 구간의 중간쯤 되는 지점인데요. 악양 들판을 가로지르면 입석리이고 거기서부터 부춘마을로 넘어가는 윗재까지는 경사가 제법 있는 오르막길이 쭉 이어집니다. 둘레길 옆 아름드리 서어나무 밑에는 쉼터가 마련되어 있어 한가한 날이면 그 쉼터 평상에 앉아 책도 보고, 둘레길을 걷다 쉬어가는 이들과 말동무되어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누곤 합니다.


오후 느지막한 시간, 무료한 시간을 보내기엔 집보다 나을 것 같아 쉼터에 나갔습니다. 평상에 누워,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저 둘레길을 걷고, 어떤 느낌을 받아 갈까?,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있을 때 중년 여성분이 오르막길을 가쁜 숨을 몰아쉬며 걸어 올라와 한숨 돌리고 가야겠다며 맞은편 벤치에 앉길래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잠시 주고받은 일상적인 대화였음에도 그분의 목소리에는 물기가 묻어있었고 간간이 한숨도 섞여 나왔습니다. 사연 없는 삶이 어디 있겠습니까만, 그 분과 나눈 대화 때문인지 왠지 오늘은 마음이 스산하고 지금껏 보아왔던 둘레길 걷는 사람들의 여러 모습이 눈앞에서 계속 겹쳐집니다.


지리산 둘레길에는 여러 느낌이 중첩되어 있습니다. 딱 부러지게 정의되지 않는, 에둘러 표현하면 ‘다의적(多義的) 애매함’이라 할 수 있을까요. 그 길을 걷는 사람들의 표정에서도 마음에서도 그런 느낌이 묻어납니다. 지리산 둘레길은 산티아고나 구마노고도(熊野古道)처럼 종교적 순례길도 아니고 제주 올레길처럼 마실길도 아닙니다. 화엄사나 쌍계사 같은 유명 절집 다 피해 가고 곳곳에 숨어있는 현대사의 현장도 피해 가니 역사 문화 탐방길도 아닙니다. 그곳에 길이 있어 그 길 따라 걷는 길입니다. 굳이 이름 붙이면 나무 풀꽃 보며 걷는 ‘생태길’이라고 할 수도 있을 법한데요. 아니면 마을과 마을을 이어주는 ‘교류와 소통의 길’, 또는 그냥 땀 흘리며 걷는 등산길이라 해도 좋고요.


걷다 보면 언젠가 출발점으로 되돌아오는 길, 시작도 끝도 없는 길이 바로 지리산 둘레길입니다. 화엄의 세계로 가는 “행행도처 지지발처(行行到處 至至發處)”*의 길일지도 모릅니다. 출발한 곳이 끝나는 곳이고 끝나는 곳이 출발하는 곳이니 그건 바로 경계가 없는 무애(無碍)의 길, 자유의 길일 것입니다.


그 속으로 들어가면 인간의 손을 타지 않은 자연과 생태가 있고, 벗어나면 지리산의 아름다운 풍광이 펼쳐집니다. 지리산에 기대어 살아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지리산 둘레길은 지리산의 넉넉함을, 그 속의 자연과 인간의 삶을 담아내는 또 하나의 살아있는 생명공간이 되고 있습니다.


오늘도 사람들은 그 길의 매력, 아니 그 마력에 홀려 지리산 둘레길을 걷습니다.**


*의상스님이 방대한 <<화엄경>>을 압축하여 7언 30구 210자로 된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를 지은 후에 이를 다시 “행행도처 지지발처(行行到處 至至發處)” 8자로 요약했다. 210자를 일승법계도(海印圖)라는 미로 같은 도장에 배열하면 출발한 곳이 끝나는 곳이고, 끝나는 곳이 출발하는 곳이 된다. “걸어도 걸어도 그 자리, 가도 가도 떠난 자리”라는 것이다.


**지리산 둘레길은 2008년 전북 남원 주천에서 경남 함양을 거쳐 산청 초입에 이르는 71km 구간이 먼저 개통되었고, 2012년까지 순차적으로 20개 코스 274km의 둘레길이 완성되었다. 현재는 지선이 추가되어 5개 시군, 20개 읍면, 100여 마을을 지나는 21개 코스 295km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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