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은 절실한 현실이었습니다
한 차례 비가 지나간 뒤 하늘은 더없이 맑고 푸릅니다.
서리가 내린다는 상강(霜降)이 며칠 앞이니 가을은 이미 깊었습니다. 따가운 햇살에 작물이 영글어가고, 그것을 바라보는 농부들의 얼굴에도 여유가 묻어나는 가을날 오후, 차 한 잔에 그 여유로움을 담아봅니다.
지리산 형제봉 자락에 집 짓고 최소한의 형식을 갖춘 삶을 시작한 지 넉 달이 지나고 있습니다. 터 파고 기초 콘크리트 작업할 때가 지난해 이맘때였으니, 이곳에서 네 계절을 보낸 셈입니다. 좀 더 살아봐야 알겠지만, 이곳은 한 겨울에도 양명하여 따뜻한 기운이 가득하고, 사계절 변화가 뚜렷하면서도 각각의 넉넉한 아름다움을 품고 있었습니다. 추위를 타는 내겐 따뜻한 겨울 한 철만으로도 다른 부족함을 채워주기에 충분한 곳이니 무얼 더 바라겠습니까.
며칠 전 강원도에 전원주택을 준비하고 있는 지인 부부가 악양 집을 방문했습니다. 주변 풍광이 너무 좋다는 찬사에다 집 구조의 단순함과 열린 공간감을 벤치마크 하고 싶다는 덕담(?)을 하길래 “다 제 눈에 안경일 뿐”이라고 화답(?)했습니다. 밤이 깊도록 집 짓는 일과 관련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고, 자연스레 지난 1년 동안의 여러 장면들을 떠올리며 집 짓는 일의 의미와 그 힘듦을 풀어놓는 시간이 길게 이어졌습니다.
돌아보건대 집 지을 땅을 마련하기까지는 꿈에 부풀어 꿈을 좇는 시간이었다면, 건축은 절실한 현실이었습니다. 시공자와의 불협화음은 도처에 깔린 지뢰와 같았고, 한정된 예산은 꿈을 깨고 현실을 돌아보게 하는 각성제였습니다. 우리 삶이 그렇듯 건축은 되돌릴 수 없는 과정입니다. 머릿속에 그렸던 공간이 생각과 다른 모습으로 실체화될 때는 아쉬움을 넘어 고통으로 다가오고 되돌아갈 수 없음에 절망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생각이 설계도가 되고, 설계도가 입체적 구조물이 되어가는 과정은 충분히 흥미롭고 신비로웠습니다.
이런저런 사연을 남기며 집은 지어졌고 이곳은 새로운 삶의 공간이 되었습니다. 땅 구입에서 준공까지 2년 남짓, 실제 건축에는 아홉 달가량 걸린 여정이었습니다. 각 단계 하나하나가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었고, 그 문은 쉽게 열리지 않았습니다. 아쉬움과 고통이 함께하는 시간의 연속이었습니다. 어지간해서는 늘지도 줄지도 않는 몸무게가 지난 반년 동안 5kg 줄었으니까요.
주변 지인들이 고생했다며 덕담을 건네고 그 무모함을 부러워하기도 하지만, 지금 이 순간 특별히 기억하고 싶다거나 의미를 두고 싶은 것은 얼른 떠오르지 않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추억되고 정리되겠지요. 다만 하나 그 지인에게 꼭 하고 싶었던 말은 “세상사 뜻대로 안 되는 일이 한두 가지 일리 없지만, 집 짓는 일은 반드시 그 속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