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2막, 53계단에서
젊은 시절 한때는 닉네임을 ‘길만사’라고 했었다. ‘길을 만드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인생의 새로운 길을 개척하겠노라는 호기도 있었다. 그런데 가만 보니 꼭 무슨 절 이름 같아서 좀 이상했다. 법정 스님의 길상사, 삼랑진의 만어사, 그 두 사찰의 첫 음절을 조합한 느낌이라 새로운 맛이 안 들었다. 그래서 그냥 묵혔던 것이다.
어쨌든 말이 씨가 되어 그런지 근래 4년 이상 산길 만들기에 몰두하고 있다. 작업로에 돌을 깔면서 얼마나 일을 했던지 손이 거칠어지고 오른손 엄지는 뼈도 휘어졌다. 포클레인으로 해야 할 일을 삽과 괭이, 그리고 맨손으로 한다. 우공이산의 고사까지 떠올리며 혼자서 미련하게 땀 쏟는다. 그런데 제일 중요한 것은 길 만들기가 재미있다는 사실이다.
첫 작품은 53계단이었다. 아내의 집은 약간 높은 언덕에 있는데 거기에 53계단을 만들었다. 돌덩이를 굴려오고 참나무를 잘라서 만드는 작업인데 일주일 내내 콧노래 흥얼거리며 즐거웠다. 숲 속 언덕에 참나무 토막으로 계단을 만들면 걷기 편한 오솔길이 된다. 물론 똑바른 길은 아니다. 가다가 바위 만나면 약간 돌아가고, 개울 만나면 통나무 걸쳐 다리를 만든다. 구부정한 아날로그식 길이라 더 정답다.
긴 장마 탓으로 작업로에 차바퀴가 빠져서 애를 먹었다. 비 그치자마자 어디 가서 돌을 좀 얻어온 나는 작업로 보수를 시작했다. 이런 일은 종종 생기지만 기꺼운 마음으로 괭이를 든다. 뙤약볕 아래에서 땀을 뚝뚝 흘리며 왜 그렇게 기분이 좋았던지 모르겠다. 한참 낑낑대다 바퀴가 진창길을 넘어가는 순간 나의 환희는 터지고 만다.
아자, 길만사! 를 외치면서.
잡초 우거진 산에서 예초기로 길을 내면 그것도 참 재미있다. 더부룩한 풀을 깎으면서 말끔한 뒤쪽을 보고 나는 쿡쿡 웃었다. 고등학생 때 교련 선생님에게 걸려서 머리 가운데를 거쳐 뒤통수까지 이발기로 밀렸던 일이 떠올랐다. 킬킬대던 친구에게 내가 성깔 부린 것은 선생님에 대한 화풀이 대용이었으리라.
장마철에 배수로를 넓히는 일까지 재미있다. 배수로 역시 길이다. 고여있던 물이 삽질을 따라서 조르륵 흘러가는 것을 보면 기분이 좋다. 물도 나만큼 신나는 모양이다. 오후에는 토마토 밭, 가지 밭에도 배수로를 깊게 파야겠다. 작물들도 좋아할 것이다.
생각해 보니 젊은 시절에는 오직 한 길, 학원 운영에만 매달렸다. 딴짓이라면 학원연합회 활성화에 일로 매진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봐도 뜨거운 열정의 40년이었다.
학원을 접고는 이제 산에서 내 인생의 새로운 길을 만드는 중이다. 자식들이 내 건강을 걱정하지만, 여기서 멈추면 자전거처럼 쓰러질 것이다. 내 삶을 닮은 후진 오솔길, 그런 길을 계속 만들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