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한, 사죄, 다짐.... 그리고 사랑해요.
아내는 그해 여름에 하늘문을 열어버렸다. 암 환자로서 현대 의학의 한계를 알아챘는지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편하게 갔다. 나와 아이들에게 큰 부담 지우지 않고 자신의 성격처럼 조용하게 갔다. 혼자서 자신의 영정까지 준비해 두고 부엌살림이나 밑반찬까지 꽤 많이 만들어놓고 홀연히 떠났다. 첫 손자에게 우유 한 병 먹이고는 깨꽃 떨어지듯이 꽃잎 접었다.
나는 아내와의 39년 인연을 고마워한다. 헐렁한 쌀 봉지 탈탈 털면서도 삼 남매를 잘 키워줘서 무엇보다 감사하다. 평생 고생시킨 게 속이 타도록 미안하다. 살면서 본의 아닌 거짓말도 더러 했다. 그중에서도 ‘산에서 살자’고 약속한 것을 못 지켜서 너무나 죄스럽다.
경상도 꼰대들이 흔히 그렇듯이 나는 아내에게 꽃을 선물한 적이 없다. 아내는 세 아이들 다음으로 꽃을 좋아하는 사람인데, 그 사실을 번연히 알면서도 꽃 선물은 하지 않았다. 꽃이란 우선은 좋아도 금방 시든다는 점이 싫었기 때문이다.
8년 전에 암 진단을 받은 아내가 꽃 선물을 받아 본 적이 없었다고 했다. 꽤 서운한 눈빛을 보이기에 내가 큰소리 땅땅 치고 약속했다.
“시시하게 꽃 몇 송이 선물하기보다 아예 큰 꽃동산을 만들겠소. 최소한 2만 평 이상은 만들 것이오.”
아내는 또 허풍이라며 눈을 흘겼다.
그러나 나는 그 약속 후 2년 동안 14개의 산을 살펴본 끝에 이 산을 샀다. 집에서 자동차로 30분 거리에 있는 23,160평의 산이다. 산이 마음에 들어서 무리하게 돈을 빌리기도 했다.
우리는 틈틈이 우리 산에 다니면서 많은 계획을 세웠다. 나는 ‘약속 꽃동산’이라는 이름을 미리 짓고 그 산을 우리의 왕국으로 만들자고 했다. 작년에는 그 산에 임도가 기분 좋게 뚫려서 아내의 회갑선물이라고 좋아했었다.
정남향의 방향성도 좋고, 부드러운 화강암이 많고, 마사토를 거쳐 나오는 물은 겨울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다. 재래종 육송이 건강해서 송이버섯도 나오고, 참나무 그루터기에서 영지버섯이나 목이버섯도 종종 만난다.
잘 아는 지인에게 부탁하여 집터도 골랐다. 아내는 햇볕이 잘 들고 산길이 훤히 보이는 그 자리가 마음에 든다고 했다. 그런데 우리가 살 집으로 골랐던 집터가 이제 아내의 묘터가 되고 말았다. 나는 아이들과 의논하여 그 자리에 평장으로 아내를 묻었다.
‘양택으로 좋은 자리가 음택으로도 좋다.’고 하던 친구의 말이 단순한 위로가 아니길 바란다. 어쨌거나 아내의 뼈를 묻은 그 자리 옆에 장차 들어갈 내 자리까지 아들에게 일러두고 관리한다.
이제 나는 두 가지의 숙제를 잊으면 안 된다. 어쩌면 이 숙제는 내 여생의 목적이며 의미일 것이다. 그것은 남은 두 아이의 결혼과 꽃동산을 만드는 일이다. 아이들 결혼이야 저네들이 잘 알아서 하겠지만, 꽃동산은 내가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이것은 아내와의 약속이라 아이들에게도 절대 산을 팔지 말라고 당부했었다. 물론 아이들도 안 판다고 했고, 나는 내 아이들을 믿는다.
지금 나는 ‘약속 꽃동산’을 만들기 위한 구상에 착수했다. 우선 아내의 빈자리 정리와 49재가 끝나면 꽃씨 모으는 일부터 할 것이다. 아내가 모아둔 꽃씨도 많이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더 모아야 한다.
거제의 ‘외도’를 모델로 하되 화려하게 할 생각은 없다. 아내는 본래 화려하거나 비싼 꽃보다 수수한 야생화를 더 좋아했다. 구절초, 감국, 민들레, 할미꽃, 원추리, 달맞이꽃, 해바라기를 비롯하여 누가 가져가도 아깝지 않을 꽃들을 좋아했다.
3년 계획을 세운 것은 내 성미가 급해서이다. 그리고 10년이 걸릴지도 모른다는 걱정은 나 혼자 작업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일은 나보다 아내가 훨씬 전문가인데 그 사람이 호미질을 못 하니까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아내는 비록 호미질을 못 하지만, 나에게 괭이와 삽을 잡게 하고 있다.
나는 투병 중이던 아내에게 타샤 튜더 할머니처럼 살게 해 주겠다고 장담했었다. 버몬트 주의 30만 평은 못 되지만 여기 '약속 꽃동산'에서 꽃 가꾸는 아내를 보고 싶었다. 그러면서 나는 헨리 데이비드 소로처럼 살고 싶어 했다. 그런데 나는 뒤늦게 깨달았다. 소로는 아내 없이 혼자 살았던 사람이다. 내 희망이 방정맞아서 나도 혼자 남은 게 아닐까 생각하니 죄인처럼 가슴이 답답해진다.
나는 '약속 꽃동산'과 함께 작은 움막을 만들고 아내의 곁에 살 것이다. 그리고 내 명이 다하는 날에는, 머리 길고 말이 적으며 눈이 큰 그녀에게 한 번 더 프러포즈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