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드덕!“ 차가 지나가고 난 자리에 파도처럼 먼지가 피어오른다.
건조한 날씨가 길어져 답답하였다.
날씨를 경고하는 문자가 매일 중첩되어 날아왔다.
건조한 날이 오래가는가 싶더니
오늘은 반가운 봄비가 내린다.
꽃나무가 촉촉이 적셔질 반가운 비.
봄비였다.
벚꽃이 났던 자리는 색을 바꾸어
연둣빛 파도가 되어 흔들거렸다.
빽빽하게 들어앉아 풍성함을 자랑했던 꽃잎들은
봄비와 함께 아스팔트 위 얼룩덜룩한 길을 만들었다.
자동차 바퀴가 지나가기 미안한 꽃길이었다.
비바람에 떨어지지 않으려고 가지를 꼭 잡고 버티는
벚꽃잎들의 마지막 팔랑거림이 애처로웠다.
만발했던 그 기억이 생생하였기에
길바닥에 마구 흩뿌려 버려진 꽃잎을 보니
마음이 불편해지는 것 같았다.
봄비가 오기 전까지 일주일 내내
벚꽃을 즐기기 위해 사람들이 붐볐다.
무성한 꽃잎처럼 그들의 추억들도
여기저기 피어나는 것 같았다.
그 희고 찬란하던 벚꽃잎들은 떨어진 수만큼
그들의 많은 봄을 시작하게 해주었다.
다시 만난 봄이 왔다.
어린 시절.
내게 봄이 찾아왔음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두꺼운 옷을 입고 놀다 옷을 한 겹 벗어던지고
자유롭게 놀 수 있는 시즌이 되었다는 것뿐이었다.
친구들과 어울려서 논다는 것에
계절과 시간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면
겨우내 터져있던 손등이 조금 아물고
들썩거리는 콧물도 멈추게 되어
한껏 가벼운 마음으로
놀이터와 골목들을 쏘다니며
놀 수 있게 된 것이 기쁘긴 했다.
2월 말이 지나 3월이 되면
거실에 깔아놓은 작은 카페트 위로
따사로운 햇살이 좀 더 밝게 들어왔다.
거실 바닥에 등을 붙이고 게
으름뱅이처럼 해를 쪼이며 누워 있으면
내가 뒹구는 게 싫었는지 아니면
따사로운 해가 아까웠는지
엄마는 겨우내 덮었던 두꺼운 솜이불을 꺼내오셨다.
솜이불 가운데에는 실크 천에
아름다운 자수들이 수놓아져 있었다.
내가 가장 좋아했던 이불은
연한 귤색 바탕에 우아한 학과
구름 모양이 있는 이불이었다.
머리에 빨간 칠한 긴 다리를 가진 학들이
다리 하나를 들고 있거나
날개를 활짝 펼쳐 우아한 날갯짓을 하며
날아가는 모양이었다.
실크 천을 두 손으로
살살 매만지면 작고 보드라운
학의 볼통한 몸뚱이도 손끝에 만져졌다.
학의 몸을 직접 만지는 그 감동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살에 닿는 그 감촉이 좋아서
아침마다 기지개를 켜고 기상을 했음에도
괜히 발바닥으로, 발등으로
학들이 날아다니는 실크천을 문질러 보고는 했다.
결혼할 때 최고급으로 해 오셨다던
이 목화 솜이불을
엄마는 익숙한 손으로 뜯어내셨다.
겨울용 두꺼운 이불보의 면실을 송곳니와
쪽 가위를 이용하여
솜과 이불보로 완벽히 분리해내셨다.
이불보는 벗겨낸 즉시 세탁기로 들어가
겨우내 함께 뒹굴었던 온기가 제거되었다.
보송보송한 새 커버는
장롱 깊숙이 잠들어있다
봄과 함께 돌아왔다.
봄이 되어야 만날 수 있는 새하얀 이불보였다.
봄에 만나는 새하얀 이불보는
카페트 위에 펴자마자 그 위에
큰 대 자 모양으로 풍덩 뛰어 들어가
깨끗하고 향긋한 냄새를
폐의 깊은 곳까지 닿도록
담뿍 들이마셔 주어야 할 것만 같던
내 어린 시절 사랑하는 아이템이었다.
내가 가장 먼저 향과 맛을 본 이불보는
반나절 넘게 햇볕에 말려진 목화솜을 만나 합체되었다.
엄마 손보다 큰 대바늘이 즉시 소환되었다.
우리 집 바늘 중 가장 큰 크기였다.
그 대바늘에 면실을 끼우는 건 나의 몫이었다.
엄마가 눈이 침침하여 꿰기 힘들다고도 하셨지만,
나에게도 작은 역할을 주어
이불을 소중히 했으면 하는
엄마의 뜻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대바늘에 면실이 끼워지면
엄마는 바늘로 머리를 두어 번 ”슥슥” 긁고서는
두꺼운 목화솜과 이불보를 꿰매는 작업을 하셨다.
머리에 슥슥 문질러야
바느질이 더 잘 된다고 하시며
연신 바늘을 비스듬히 세워 머리를 긁으며
단단하게 이불을 꿰매셨다.
겨울과 봄이 만나는 일이었다.
엄마가 이불을 꿰매는 동안 나는
곱게 끝부분이 접어진 이불보 끝을
힘을 주어 잘 잡아주는 역할을 해야 했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지만,
엄마의 바느질이 끝날 때까지
계속 잡고 있다 보면 팔이 조금 아프기도 하였다.
하지만 보송보송한 이불보가
목화솜과 합체되는 고결한 바느질을
한 땀 한 땀 지켜보고 있노라면
지겹지는 않았다.
내가 밤부터 덮고 자게 될 희고
깨끗한 봄 이불.
듬성듬성 시침질로
이불보가 흐트러지지 않도록 잡아주고
네 방향을 모두 힘 있는 손길로
한 땀 한 땀 박아주면
위아래와 왼쪽, 오른쪽이 모두 반듯한
‘봄 이불’이 탄생하였다.
봄이 완성됐다.
완성된 봄 이불 위로 벌떡 드러누워
이리저리 구르면서 새
로운 기분을 만끽해도 되는 순간이었다.
좋아죽겠다는 듯 발까지 팡팡 구르며
이불 위에서 기쁨을 표현하다가
먼지가 거실에 풀풀 날리면
궁둥짝을 한 대 맞고 이불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황홀했던 그 느낌이 생생하다.
35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그 냄새,
푹신함 그리고 둥둥 떠다니던 먼지가
한 올 한 올 보이도록 투명하고 따뜻했던 햇볕까지.
나에게 매년 봄은
엄마가 새로 꿰매주신 이불보의 냄새로 시작되었다.
그 냄새를 맡고 보드라운 감촉을 느끼면
본격적인 봄이 시작되는 것이었다.
봄을 담은 냄새가 나는 이불 덕에 밤잠도 잘 자고는 했다.
새 계절을 맞이하는
반듯한 바느질이 끝나고
해가 지는 저녁이 되면
퇴근하시는 아빠의 구두 소리에 맞추어
아담한 저녁 밥상이 카페트 위로 차려졌다.
내가 좋아하는 고기는 잘 보이지 않는
평범한 밥상이었다.
생선구이 정도가 밥상의 중간쯤에 놓이곤 했다.
이때쯤에는 꼭 먹어야 한다며
봄 냄새가 물씬 나는 국이나 찌개가 으레 있고는 했다.
쑥이나 냉이가 들어간 엄마의 된장찌개를 먹으면
몇 달 동안 잠들어있었던 것만 같은 몸이 제대로 깨어났다.
향긋한 봄나물이 듬뿍 담가진 된장찌개가
그땐 왜 그리 싫었는지.
정성스러운 그 밥상을 앞에 놓고
반찬 투정을 하기 일쑤였다.
두부만 겨우 건져 먹고
눈치를 보며 최대한 냉이는 밀어내고
국물만 슬쩍 밥그릇에 떠왔다.
된장 국물이 적셔진 쌀밥을
우물우물 씹어먹으면 냉이 향이
금방 입안에 퍼졌다.
냉이가 뭔지, 왜 봄에 먹어야 하는 것인지
궁금하지도 않았지만,
그 맛과 향이 냉이 때문이라는 건
금방 눈치챌 정도로 평소와 맛이 달랐다.
맛이 좋았지만,
투덜대는 말은 그만두고 싶지 않았다.
애써 봄나물을 뜯어와 저녁상을 차리셨는데도
혼내는 말도 하지 않으시고
한 번 더 먹어보라 권하시기만 할 뿐이었다.
냉이가 잔뜩 들어간 된장찌개를
한 술 크게 떠서 드시던 아빠는
“크어어! 좋다!” 하며
트림같이 큰소리를 내며 밥을 드셨다.
왠지 그 소리를 듣고 있으니
맛이 없을 것 같은 냉이를
한 번쯤 용기 내어 먹어볼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망설이고 있는 내 맘을 읽으셨는지
지금 먹는 봄나물은
몸에 약이 된다며 한 번 먹어보라
엄마는 재차 권하셨다.
먹으려던 순간, 약이 된다는 말을 들으니
약초를 넣은 된장찌개 같았다.
된장찌개와 약초라니.
약이 된다는 그 말을 안 들었다면
더 맛이 좋았을 것이라며 입을 삐죽거렸다.
동네 아주머니들과 뒷산 등에서 따오신 달래는
도마 위에서 총총총 잘게 썰어졌다.
참기름과 통깨를 곁들인 달래 양념간장은
마른 김 한 장에 밥과 함께 올려 먹었다.
뜨거운 김이 폴폴 나는 쌀밥에
냉이로 만든 양념간장을 곁들여
김이 눅눅해지기 전에
얼른 입안으로 옮겨 넣으면
냉이와 달래를 준다고 투덜대던
내 입이 쏙 들어가는 그런 맛이 났다.
돌김에 간장을 찍어 자주 먹던 반찬이었지만
평소보다 더 많이 김을 싸서
간장을 올려 먹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투덜대는 말과는 다르게
찌개며 냉이로 만든 양념간장을
빠르게 먹어버려 내 마음이 그만
다 들켜 버린 것만 같았다.
엄마가 손수 뜯어와 끓여주신
냉이 된장찌개의 맛이 생각이 난다.
약초 맛이 난다며 투덜거렸던 그 음식이
그리울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맛있는 시판 된장에 끓인
요즘 먹은 된장찌개들도 맛이 좋지만,
35년 전에 먹었던 그런 맛을
다시 만날 수 없을 것 같아서 더욱 그립다.
그 시절에 살았던 집 뒷산에서
엄마가 캔 냉이여야만 하고
옆에서는 아빠의 트림 같은 큰 리액션이 있고
내 표정은 꼭 우거지상이어야
그때와 똑같은 맛이 날 듯도 싶다.
내 어린 시절의 봄.
추웠던 날들이 지나가고
집으로 찾아오는 해가
조금 따뜻해졌음을 알아채게 되면
카페트 위로 게으름뱅이처럼 굴러다니는
내 눈은 해마다 같은 일을 반복하면서
봄을 반갑게 맞이하는 분주함을 쫓아다니고 있었다.
엄마에게 봄은 ‘대청소’를 하고
겨우내 묵었던 것들을 정리하는
할 일이 잔뜩 있는 구간이었고,
나에게 봄은 겨울을 정리하는 엄마의 모습을
자세히 관찰하며 온기가 생긴 해의 따스함을
조용히 만끽하는 평화로운 시간의 시작이었다.
바깥 기온이 높아져서
윗옷을 하나 벗을 수 있어서 봄이 아니었다.
봄은 눈으로 피부로 그리고
입으로도 느껴져야 봄이었다.
그리고 매년 반복되었으므로
기다려지지는 않았지만
그게 또 그렇게 싱그러울 수가 없는 봄이었다.
투덜대는 말투와는 반대로
어쩌면 매년 새 이불보가 꺼내지는 순간을
기다렸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2023년 봄비가 내리고 있다.
솜이불을 꿰매기 좋도록 햇볕이 나는
유쾌한 날은 아니지만
빗방울이 바람을 타고 “와다닥“ 하고
창에 부딪히는 소리에 귀가 즐거운 날이다.
그리고 40년째 반복되는 봄의 기억이
금방 내려진 커피처럼
진하게 봄비가 되어 내리는 촉촉한 날이다.
남편과 나는 벚꽃이 만발한 곳을
일부러 찾아갔었다.
봄을 간직한 사진을 찍기도 하고
손을 잡고 벚꽃이 눈처럼 날리는 곳을
느린 걸음으로 걸어보기도 하였다.
새하얗게 뒤덮인 눈처럼
벚꽃은 머릿속을 하얗게 만들어준다.
그 아래를 걷는 내내 걱정이나 고민 들은
꺼내어질 틈이 없었다.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곳에서
우리는 봄에 취했다.
이제는 누군가가 나에게
봄 내음을 입에 넣어주지도,
손에 만져지게도 해주지 않는다.
스스로 찾아 나서야 봄을 간간이 느낄 수 있다.
어린 시절에는 엄마 아빠 나이가 되면
봄을 담뿍 느낄 수 있을 줄 알았다.
”맛있다.“ 소리를 연발하며 냉이된장국을 삼키고,
뽀송한 봄 이불을 꺼내면서
봄이란 녀석을 온몸으로 느끼며
마주할 줄 알았다.
겨울잠에서 일어나라고
이제는 따뜻한 봄이 되었다며
등을 토닥여 줄 봄의 소리가 가득할 줄로만 알았다.
내가 찾지 않으면 눈에 띄지 않는 봄이다.
중년이 되니 봄과 마주함이 어려워졌다.
반색하며 봄나물을 먹을 수 있고,
반듯하게 꿰매질 이불보를
밝은 표정으로 잡아주고 싶지만
봄은 내게 먼저 노크하지 않는다.
억지로 입으로 들어가는 봄나물도,
긴 시간을 꿰매어 덮어지는 봄 이불도 아니게 됐다.
벚꽃단지를 찾아다녀 ‘봄‘과 겨우
마주하였는데 봄비로 생을 다하는
꽃잎이 떨어지니
어린 시절의 그때보다 짧아진 봄의 시간이 애처롭게 느껴진다.
매년 다시 돌아오는 것이 분명하지만
해가 갈수록 더 고귀한 봄이다.
이제는 봄의 몸뚱이 반이
성큼 들어오니 봄이더라 하게 되었다.
작년보다 더 반갑고,
더 기다려지는 봄.
내 어린 시절의
싱그러운 봄의 냄새를 잊지 않고 싶은 맘에
봄의 끝자락을 잡아 본다.
봄의 어느 날,
내 가슴 속 촉촉이 적셔지는 봄비가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