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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 회의

by Anna

강물을 따라 가로등이 박혀 있는 산책로.

잘 닦아놓은 산책로 스피커에서

음악이 흘러나왔다.


스피커 주변에는

귀신들이 옹기종기 많이 모여있었다.


너무 늦은 시간이 아닌 이상

늘 음악이 흘러나오기 때문에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는 많은 귀신들이

귀 호강이라도 하러 스피커 밑에서

몸을 흐물거리고 있었다.


이 동네 담당 저승사자가


음악을 듣고 있는 귀신들과

떠도는 동네 귀신들을

모두 불러 모았다.


근래 들어 고통스럽다는 듯

비명을 지르거나

울부짖는 귀신들이 많아져


인간들의 삶에 피해를 준 것이

회의 소집 이유였다.


간혹 귀신의 형상을 볼 수 있거나

귀신들이 하는 말을 듣는

인간들이 있기 때문에


인간사에 영향을 끼칠 수 없도록

귀신들의 기강을 바로잡아야 했다.


이에, 저승사자는

귀신들의 회의를 소집하였다.



동네에 떠돌던 귀신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다리 아래

축축하고 습한 곳이

귀신들로 가득찼다.


하나같이 축 늘어진 어깨에

생기라고는 없는 얼굴이었다.


귀신들은 우울증 환자들처럼

고통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저승사자는 주머니에서

검은 실 묶음을 꺼내들었다.


검은 실 묶음은

다시 하얀색 끈으로

단단히 묶여있었는데

검은 날실 하나하나가


귀신들의 출석부이자

태워 없애버릴 수도 있는

목숨줄이기도 했다.


자신을 상징하는

검은 날실이 없어진다면


이승에서 몇백 년,

저승에서 몇 천년을 견뎌도

다시 환생할 수는 없었다.


때문에 검은 실 묶음을

저승사자가 꺼내들자마자


핏기 없는 낯빛들의 시선이

한 군데로 집중되었다.


저승사자는

검은 실 묶음을

손바닥 위에 가만히 올려놓고

움켜쥐었다.


실뭉치가 손에 닿이면

어떤 귀신이 오지 않았는지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귀신 회의에 오지 않은

정신 줄 놓은 귀신은

남의 집 처마 밑에서

넋 놓고 앉아있었다.


귀신의 모습을

머릿속 이미지로 본 저승사자는


순간 이동으로

귀신의 뺨을 있는 힘껏 갈기고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다리 아래 모여있는 귀신들은

저승사자가 다녀왔는지

알아채지도 못하였다.


회의에 오지 못한 귀신은

저승사자가 당기는

강력한 힘에 의해 호출되었다.


정신이 돌아오기도 전에

뺨을 맞은 귀신이

회의장 맨 앞자리에 나동그라졌다.


갑자기 출연한 귀신이

뺨을 붙잡고

일어나지도 못하고 있는데도,


다른 귀신들은 놀랍지도 않은 일처럼

눈길을 주지 않았다.


"자, 이제 회의를 시작한다.

어젯밤과 그제 밤새도록 비명

소리가 그치지 않았고,


3일 전에도 새벽시간에

4시간 동안 내리 비명을 질렀다지?


비명을 지르며 우는 놈이

있으면 또 다른 놈이

따라 비명을 지르니


인간들이 사는 동네에

비명 소리가 끊이지 않았겠구나.


그리고 2주일 전부터는

인간들이 사는 영역에서

울부짖는 놈들이

하나 둘이 아니라고 하던데.


비명을 지른 놈은 총 여섯,

울부짖은 놈들은 총 열넷.


이 검은색 실을

잘근잘근 씹어 먹기 전에

어떻게 된 일인지

낱낱이 밝혀야 할 거야."


울부짖고 비명을 지른 귀신들의

눈빛이 흔들리고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죽은 지 오래된 귀신 중의 하나가

용기를 내어,

조용히 손을 들었다.


죽은 지 500년은 된 듯한

오래된 차림과 행색에

상투까지 잘린 귀신이었다.


"나는 내 가족이 죽고

다시 환생하여 다시 죽는 것을

여러 번이나 보아 온 귀신이오.


내 몸뚱이는 이미 오래전에 죽어

살이 썩어가는 냄새가 진동을 하는데,


500년이 넘도록

저승으로도 가지 못하고

환생도 하지 못하니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오.


이렇게 살바엔

죽고 싶다고 생각한 것도

400년이오.


나는 더 이상 흘릴 눈물도 없소.


나를 그냥 저승으로 보내주시오.

제발 부탁이오."


"저승으로 가고 싶단 말이지.


너는 아녀자를 겁탈하여

상투가 잘리고

고문을 받아 죽은 귀신 아니더냐."


"그. 그런."

상투가 잘린 귀신이

대답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눈을 피하였다.


이번에는 대머리 귀신의

빛나는 머리통을 비웃었던

단발머리 귀신이

소심하게 손을 들었다.


"떼 지어 몰려다니는

귀신 무리들에게

언제까지 온갖 욕을 들어야 합니까?


그들은 법도 없고

눈앞에 보이는 아무나 잡고

비난하고 조롱합니다.


떼 지어 몰려다니는 귀신들 때문에

하루하루가 겁이 나고 무서워

도저히 살 수가 없습니다. "


대머리 귀신을 비웃었던 일이

기억나지도 않는지

자신이 당한 억울한 일을

저승사자에게

일러바치는 단발머리 귀신이었다.


몰려다니며 시비를 걸고

욕을 하는 신생 귀신 무리들의 시선이

단발머리 귀신에게로 향했다.


단발머리 귀신은

그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닿자

두려움에 몸을 움츠러

다른 귀신들 뒤에 숨어버렸다.


"떼 지어 몰려다니며

다른 귀신들을 괴롭히는

귀신 무리도 있단 말이지."


무리를 짓는 귀신들이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이번에는 뺨을 맞아

뒤늦게 정신을 차린 귀신이

겁도 없이 손을 들었다.


"갈 곳이 없어 저는

우리 가족들이 사는 집에서

함께 지내는데,


가족 중 그 누구도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내가 없는데도 가족들은

늘 웃으며 지냅니다.


맛있는 걸 먹으면서

내 생각은 하지도 않고

하하 호호 웃으면서

텔레비전을 봅니다.


제가 죽고나서 보험금이 나오니

오히려 더 행복해 보입니다.


배은망덕한 자식새끼들은

죽은 아비 생각은

하지도 않는 데다가


못생긴 마누라는

내가 없어진 후 큰 침대에서

혼자 대자로 뻗고 잠을 자는데

코까지 곱니다.


이 꼴을 보고

도저히 억울하고 분해서

내가 울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들에게 벌을 주고 싶습니다.


분한 제 마음을 좀

알아주십시오!"


뺨을 맞은 귀신은

억울하고 분한 마음에

가슴을 팡팡 치며 저승사자에게

자신의 심정을 어필했다.


저승사자는 뺨을 맞은

귀신의 이야기를 듣더니,


"전생에 아내와 두 아이를

때리고 구박한 놈이로구나.


조강지처를 두고

바람을 피워 딴 살림을 차려놓고

귀신이 되어서는

그집에가서 지낸다니

양심이 없는게냐?


벌어온 돈은 애인에게 퍼날랐으면서

아내와 아이가 배를 곯는 것은

나몰라라 했었지?"


저승사자가 말이

천둥소리처럼 커

뺨을 맞은 귀신의

머리통이 징징 울릴 정도였다.


뺨을 맞은 귀신은 이제

뺨이 아닌 머리통을 감싸 쥐고

엉엉 울었다.


천둥 같은 소리에

손을 들려던 다른 귀신들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내가 이번 회의에서

하고 싶은 말은 바로 이거야.


울부짖거나 비명을 지르는 건 인

간들이 하는 거지,


이승을 떠도는 죽은 자가

할 행동이 아니란 말이지.


한 번만 더 이런 불상사가 생기면


내 주머니 속에 있는 검은 실뭉치는

불구덩이에 처넣어질 거다.


그럼 사라지면서도

불구덩이에서 몸이 타는 고통도

똑같이 느낄 수 있을 거다."


말을 끝낸 저승사자가

'휘릭' 도포 자락을 휘날렸다.


얼굴을 도포 자락에

가려지는가 싶더니,


저승사자는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저승사자는 연기가 되어

날아갔다.


뒤돌아 귀신 무리를 보던

저승사자는 혼잣말을 했다.




"어리석은 것들.

지옥이 다른 곳에 있는 게 아니지.


인간들이 사는 세상에서

죽은 자들이 사는 것

그것이 지옥이야.


들리지도 않는 인간들에게

알아봐달라고 소리치고

계속 울부짖어라.


대답을 들을 수는 없을 것이다.


먹지도 못하는 음식 앞에서

군침을 흘릴 것이고

사랑하는 가족들을

안아볼 수도 없을 것이다.


아무리 그들의 눈앞에서

발버둥 쳐봐도 네놈들은

그냥 죽은 자야.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도 모르는데

한심한 인생을 살아온 귀신들아.


살아있는 것에 대한

감사함을 몰랐을 것이고,


상처 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었던 전생이 기억나지도 않겠지.


그걸 자신을 지키는 거라 착각하며 사는

어리석은 영혼들아.


너희 같은 어리석은 영혼들은

망자가 되어서도

저승으로 쉽게 갈 수 없어.


자신을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

살을 에는 고통으로

억겁의 시간을 견뎌내라.


이승에서 견디고

견뎌내야만 하지.


나쁜 전생을 살았던 망자일수록

이승에서 떠도는

고통스러운 시간이 길어질 거야.


그게 바로 지옥이야.


불구덩이보다 더 한 고통으로

발버둥 치며

죽고 싶겠지만 말이야.


이미 죽은 몸이라서

죽을 수도 없는

그런 끔찍한 고통을

너희들이 견뎌내야 하는 거야.


가장 무서운 벌은

이런 사실을 절대로

알려주지 않는다는 거야.


환생하여 다시 살아도

죄를 짓는

너희 같은 어리석은 영혼들은

이승에서 또 긴 시간

떠돌게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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