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을 떠돌아다니는 귀신들은 모두 다른 모습이다. 죽을 때의 모습 그대로 박제된 것처럼 살아가 한 번 눈에 익은 귀신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나이가 들어 노환으로 죽은 귀신은 주로 온화한 표정을 짓고 있으며, 화를 내고 흥분하다 뇌출혈로 급사한 귀신은 얼굴이 퉁퉁 부어있다.
죽은 이유는 여러 가지이지만, 모두 살아있는 사람을 부러워하고 이승에 대한 미련이 남아 마음에 드는 인간에게 붙어 그들을 보며 대리만족을 느끼며 살아가기도 한다.
이승에 미련이 많은 귀신은 이리저리 떠돌고 인간에게 간혹 모습을 드러내어 공포심을 주지만, 죽은 자신의 몸을 인정하고 받아들인 귀신은 몸이 가벼워져 저승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오래된 귀신들은 저승 갈 날을 손꼽아 기다리기도 했다.
집착이 심하고 남의 말을 듣지 않거나 현실을 인정하지 않는 꼰대 귀신들이 주로 이승에서 인간사를 괴롭히고 있는 것이다.
머리카락을 평생 길러 죽어서도 2미터나 되는 머리카락을 끌고 다니는 귀신이 말했다.
"나는 말이야. 살아 있을 때는 이 머리카락을 자르면 죽을 것 같았어.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근데 지금은 이 머리카락이 무거워서 저승으로도 못 가고 이승에서도 이리저리 바닥을 쓸고 다니는 데다 묶을 수도 없어서 얼마나 슬픈지 몰라! 그야말로 딱 죽고 싶어!"
그 말을 옆에서 듣고 있던 대머리 귀신이 말했다.
"죽어서도 머리카락이 없다니. 너무 불공평하지 않아? 죽을 때 가발을 쓰고 있었다면 이 휑한 부분이 좀 가려졌을 텐데! 네 머리카락을 조금 잘라 귀신 가발이라도 만들었으면!"
귀신들 대여섯이 신나는 음악이 잘 들리는 호프집 건너편에 앉아 신세 한탄을 하였다.
호프집에 가장 가까이 앉은 멀끔한 귀신이 고개를 까딱거리고 발가락을 들었다 놨다 하며 음악에 취해있었다. 야외 테이블 손님들의 닭 다리 뜯는 모습에 입안에 침이 잔뜩 고인 모습이었다.
음악에 취한 채 얼굴만 빼꼼 나오도록 후드티셔츠의 목줄을 잡아당겨 여몄다. 뽀얀 피부에 검은색의 무광 재킷에 겹쳐진 후드 티셔츠가 어쩐지 상당히 힙해 보였다.
호프집에 앉아 음악을 들으며 리듬을 타고 있는 인간들과 차이가 없어 보이는 깨끗한 차림과 웃는 얼굴에 여러 귀신들의 부러운 눈빛이 고정되었다.
음악이 끝나자 후드티셔츠 귀신은 황홀한 미소를 함박 지으며 건너편의 같은 귀신 무리들을 향해 손을 들어 인사했다.
홀릴듯한 그의 아우라에 머리카락이 긴 귀신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들어 답했다.
대머리 귀신은 "세상은 정말 불공평해! 죽어서도 멋지다니! 살아있을 때도 인기가 많았겠군. 여자 여럿 울렸겠어. 흥."
자다가 죽은 귀신은 벗은 상의를 손으로 슬쩍 몸을 가렸다. "죽을 때 많이도 입고 죽었구먼."
팬티만 입은 채인 자신의 다리를 바라보았다.
"슬리퍼도 하나 없이 맨발인 게 제일 최악이군."
"귀신이 바닥에 발이 닿지도 않는데 그게 뭐 대수라고. 내 수술이 제대로만 됐어도 너희 같은 놈들과 이렇게 떠들고 있진 않았을 거야. 절대로 다시는 같은 병원을 가나 봐라. 수술도 똑바로 못하는 머저리 같은 놈들!"
수술하다 죽은 귀신과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듯 대머리 귀신이 절레절레 고개를 가로저었다.
힙한 차림의 후드티셔츠를 입은 귀신은 아예 테이블에 앉아 인간들처럼 음식과 음악을 즐기는듯했다. 먹지 못하면서도 내내 즐거워 보이는 그의 모습에 심통이 난 귀신들은 하나둘씩 떠나갔다.
또 다른 귀신들이 음악소리에 이끌려 호프집 앞을 서성거리다 희미한 불빛 같은 아우라가 있는 후드티셔츠 귀신이 인간들과 어울려 있는 듯한 모습을 보며 조롱했다.
"야, 네가 거기서 어울려있으면 인간이 되냐?? 저것 봐, 인간들은 널 보지도 못하는데 한자리 차지하고 그렇게 인간이 되고 싶냐? 이 머저리 같은 놈아!"
귀신들이 온갖 조롱과 욕을 해대는 통에 음악소리가 잠시 묻히는 것 같았다.
귀신이 된 지 얼마 안 된 뒤틀린 귀신들이 점점 더 목소리가 커지고 후드티셔츠를 입은 귀신의 바로 앞에까지 가서 맞지도 않는 주먹을 휘두르며 으르렁거렸다.
후드티셔츠를 입은 귀신은 더욱 고개를 까딱이며 춤을 추고 히죽 웃을 뿐이었다. 초고도 비만으로 생을 마감한 귀신은 뒤뚱뒤뚱 뒤에서 걸어 나왔다.
"저 녀석 하는 짓이 정말 구역질 나! 귀신 주제에 우리 얘길 다 무시하잖아. 저승으로 날려 보내줘?"
분노에 찬 몸짓에 뱃살이 꿀렁거렸다. 토실한 손가락을 허공에 휙 하고 날리는 포즈를 취하자 귀신들은 본능적으로 닿지도 않는 몸을 피했다.
호프집 3층에 발코니에 걸려 흐느적흐느적 깃발처럼 펄럭이던 백발노인 귀신은 힘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 녀석은 귀가 안 들려. 이 녀석들아. 백날 얘기해 봐야 쟤는 듣지 못한다고. 한심한 귀신들 같으니!"
음악 소리와 귀신들의 분노에 묻혀 백발노인 귀신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후드 티셔츠 귀신은 백발 귀신이 있는 쪽을 바라보며 히죽 웃었다.
"저. 저. 저놈이! 꼭 다 듣는 것처럼 웃고 있어! 간 떨어질 뻔했네. 귀신같은 놈"
백발 노인은 놀랐다는 듯 가슴을 쓸었다.
시비를 거는 덩치 귀신들의 성화에 못 이긴 척 후드티셔츠 귀신은 치킨 냄새에 홀린 듯 호프집 안으로 들어갔다.
인간들과 한 테이블에서 즐기는 모습이 아니꼽던 동네 귀신들이 뜻을 이뤘다는 듯 소리도 나지 않는 하이파이브를 하며 승리에 도취된 표정으로 돌아섰다.
호프집 안으로 들어간 후드티셔츠의 귀신은 스피커 볼륨을 더 크게 올렸다. 돌려도 커지지 않는 음악소리였지만 후드티셔츠 귀신에게는 2배나 큰 소리로 스피커가 쩌렁쩌렁 울리는 듯했다.
꽤나 만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더 크게 까딱거렸다.
음악과 맞지 않는 박자감의 까딱거림은 오히려 힙해 보였다.
호프집 주방에서는 감자튀김과 치킨이 튀겨지고 있었다. 기름의 고소한 냄새와 수증기가 주방 안을 가득 채웠다. 치킨이 노릇해지자 60세의 숙련된 '주방 이모'는 뜰채로 치킨을 건져 기름을 빼고 치킨에 윤이 반질반질 나도록 양념을 코팅시켰다. 양념이 코팅된 치킨은 큰 그릇에 우르르 쏟아 땅콩가루를 뿌려 테이블로 나갔다. '주방 이모'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수건으로 닦아냈다. 주문서가 더 이상 들어오지 않자 빨간색의 플라스틱 보조 의자에 풀썩 앉았다. 등받이도 없는 의자에 잠시 앉아 다리를 주물렀다.
주방 이모는 몸을 돌려 치킨 기름이 가득한 튀김기 옆 끈을 달아놓은 손바닥 모양 메모장을 펼쳤다. 기름과 치킨 양념 등이 덕지덕지 묻은 꾀죄죄한 메모장이 2/3는 넘겨서야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페이지가 나왔다. 앞치마에서 굵게 적히는 네임펜을 꺼낸 이모는 메모장에 글을 적었다.
'성우야, 엄마가 너 좋아하는 양념치킨 튀겼다. 어여와서 먹거라. 너 좋아하는 모가지는 두 개란다.'
메모지에 적힌 글을 펼쳐놓은 채로 새로 들어온 주문을 보러 몸을 일으켰다.
"어이쿠" 힘차게 일어나는 소리였다.
후드티셔츠 귀신은 주방 입구에 서 있다가 메모장을 보고는 부리나케 양념치킨이 나간 테이블로 갔다.
양념치킨에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었다. 땅콩 가루가 뿌려진 먹음직스러운 모습에 히죽히죽 행복하게 웃었다. 후드티셔츠 귀신이 닭 목살을 집어먹었다. 치킨이 없어지지 않았지만 귀신은 어쩐지 맛있게도 뜯어먹었다. 바삭거리는 소리마저 들리는듯했다.
치킨을 다시 튀기려던 주방 이모는 메모장을 들었다.
'성우야, 맛있냐?'
메모장에 적힌 걸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성우는 목살을 신나게 뜯으며 고개를 연신 끄덕거렸다.
고개를 끄덕거리는 모습이 음악의 리듬을 타는 것처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