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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지 다섯 장

병상일기 #009

by 자크


뭔가 적어 볼까, 하던 차에 불쑥 떠오르는 한 사람. 열다섯에 만났던 국어 선생님이다. 얼굴은 어제 본 듯 또렷하면서도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 그를 딱히 존경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가 즐겨 내던 숙제와 그 기억만큼은 백 번 가까운 계절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마음속 어딘가에 가늘게 깔린 잔향처럼 남아 있다.


- 내 수업엔 원고지 다섯 장이란 게 있다. 당첨된 놈은 원고지 다섯 장 분량의 글을 자유롭게 써 와. 그러면 다음 수업 시작과 함께 내가 그 글을 낭독하겠다.


그렇게 말했던 첫 수업에서 나를 포함한 몇몇 친구들은 또 골치 아픈 타입이 걸렸다며 시선을 맞춘 채 고개를 주억거렸다. 희한한 인간들이 차고 넘치는 딱 그만큼 희한한 교사들도 얼마든지 널려 있던 시절이었다. 무슨 참신한 시도일까. 매질 대신 숙제를 준다든가 하는 그런 비폭력주의자류(類)인가? 하지만 들어올 때 그 손에 들려 있던 무지막지한 몽둥이를 나는 보았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그는 작은 체구가 무색하게도 신들린 듯 빠따를 쳤다. 그럼 역시 육체의 고통과 정신적 고통을 적절히 섞어 실험하는 사이코 박사류?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나는 여전히 잘 알지 못하지만, 이후 원고지 다섯 장을 처음 선고할 때의 그는 퍽 설레는 듯 보였다. 벌을 주는 표정이라고는, 누군가에게 끔찍한 고통을 내리는 표정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분명히, 그랬다는 기억이다.






- 어이 자크. 너 원고지 다섯 장!

- 아뇨. 선생님 그게 아니라요..!

- 제목은, '선생님 그게 아니라요'다.


- 풉. 병신.

- 옆에 너. 너도 원고지 다섯 장. 제목은 '풉. 병신'으로.


이를 테면 그런 식이었다. 나는 왜 수업에 늦었나, 몰래 도넛을 먹고 있었던 일에 관하여, 여름이 좋은 이유, 왜 공부를 할까... 에 이르기까지, 주제는 생각 나는 ‘모든 것'이었다. 별 새삼스러운 것들이 죄 다 글이 되는구나, 새삼스럽게도 생각했다. 그리고 수업 중 잡담을 하다 처음으로 원고지 다섯 장에 당첨되었던 늦봄의 어느 날, 좌우간 잘못해서 받는 벌인 만큼 나는 억울해 죽겠다는 듯 읍소했지만 동시에 알 수 없는 기대감으로 가슴이 뛰었다. 내가 쓴 글을 모두 앞에서 읽는다니. 생전 경험해 본 적 없는 그 일이 묘한 떨림을 주었다. 개그 콘서트마저 마다하고 모처럼 책상 앞에 앉아 원고지와 씨름을 하던 나는 마치 겨드랑이 밑에서 새가 지저귀는 듯한 간지러움을 느꼈다.






교탁 위에 놓인 두 편의 원고지 다섯 장을 보며 선생님은 흡족한 듯 웃었다. 나는 그 표정을 알고 있었다. 기대되어 죽겠다는 표정. 기묘하게 비뚤어진 그의 이목구비를 보며 나는 늘 스티븐 호킹을 떠올렸지만, 바보는 아니었기 때문에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 제목. 선생님 그게 아니라요. 참담한 심정으로 쓴다. 나는 다만...


“선생님 그게 아니라요”를 소리 내어 읽으며 그는 실룩실룩 웃기 시작하더니 이내 문자 그대로 파안대소(破顔大笑)했다. 안 그래도 비뚤어진 그 얼굴이 이래도 되나 싶을 만큼 제멋대로 일그러지는 것을 지켜보며 나는 정신을 잃을 것 같았다. 신 나서. 너무 신이 나서. 다섯 장째, 마지막 문장에 마침표가 찍히고 한 바탕 쓰나미 같은 대폭소(大爆笑)가 교실을 휩쓸고 간 순간 나는 이상하게 잠시 나른해져 잠이 들 뻔했다. 수업이 끝나고 스티븐 호킹, 아니 선생님은 내 자리로 돌아와 어깨를 툭 치더니 엄지 손가락을 추켜올려 보였다. 교무실로 향하는 그의 뒷모습을 보다가 생각이 복잡해진 나는 그날 이후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누구에게든 반짝이는 순간들이 몇 차례 찾아온다. 마치 삶이 넌지시 암시를 주듯이. 내게도 그런 순간이 몇 번은 있었다고 나는 믿는다. 그 힌트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이렇게 살아 버린 것은 온전히 내가 게으르고 무감각한 탓이겠지만, 뭐 그만한 사실일 뿐. 후회가 막급하다든가, 지금의 삶이 크게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나는 반짝이지 않는 지금도 여전히 쓰고 있다.


- 너는 나처럼 잘 생긴 것도 아니니까 글이나 써라.


학기가 끝날 무렵 그 비뚤어진 얼굴로, 잘도 그런 말을 하던 뻔뻔함이 나는 싫지 않았다. 낮은 확률이지만 언젠가 돌보아야 할 존재가 생긴다면, 반드시 원고지 다섯 장을 계승해 줘야지. 그렇게 생각한다.






뭔가 적어 볼까. 하던 차에 불쑥 그가 떠올랐다. 지금의 내게는, 아마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싶다.


- 원고지 다섯 장. 제목은 '뭔가 적어 볼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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