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이루지 못한 시간의 얼굴
어떤 사랑은 끝났는데도 사라지지 않는다. 함께 살지 못해도, 함께 버틴 시간은 몸 어딘가에 남는다. 헤어짐은 관계를 멈출 수는 있어도, 그 시간을 통과하며 달라진 우리까지 지우지는 못한다.
〈만약에 우리〉의 청춘은 반지하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그들의 시작은 밝다. 웃음이 있고, 서로의 꿈을 말하는 데 망설임이 없다. 함께라면 충분하다고 믿는다. 그 믿음은 오래 가지 않지만 거짓은 아니다. 다만 현실이 그 높이를 조금씩 낮춘다. 그렇게 가능성의 자리는 좁아지고, 사랑은 설렘이 아니라 버팀의 방식으로 자리를 바꾼다.
정원의 까인 뒷꿈치와 책상 앞에 쓰러져 잠든 은호의 등. 그 장면이면 충분하다. 오래 걸은 발과 굳은 어깨는 그들이 얼마나 버티고 있었는지를 말없이 보여준다. 사랑과 꿈으로 시작된 집은 그렇게 다른 재료로 채워진다. 무너지지 않기 위해 참는 마음이 쌓이고, 책임은 두 사람을 조금씩 닳게 한다.
그 변화는 한쪽에서만 일어나지 않는다. 정원은 먼저 알아차린다. 자신의 존재가 은호를 소모시키고 있다는 것을. 그는 버티고 있었고, 자신을 줄이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붙잡지 않는다. 조용히 물러선다. 사랑을 부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무게를 함께 짊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위해.
은호 역시 붙들지 않는다. 붙드는 대신 놓아준다. 사실은 붙잡을 힘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 공백을 지나며 그는 달라진다. 게임을 개발하는 그의 모습에는 묘한 후련함이 스친다. 모든 것을 잊은 얼굴은 아니다. 다만 한 시절을 지나온 사람의 얼굴처럼 보인다.
시간을 건너 다시 마주 선 두 사람은 ‘만약’이라는 부질없는 질문 앞에 선다. 은호는 말한다. 내가 널 놓친 거라고. 정원은 말한다. 내가 널 놓은 거라고. 비슷해 보이지만 같지는 않다. 한 사람의 말에는 아쉬움이 남아 있고, 다른 한 사람의 말에는 오래 생각한 사람의 숨이 묻어 있다. 다만 그 어긋남이 두 사람의 시간을 갈라놓았다.
그들이 헤어진 뒤의 시간은, 영화의 OST 속 한 구절처럼 조용히 흘러간다.
사랑은 봄비처럼 내 마음 적시고,
이별은 겨울비처럼 두 눈을 적시고.
떠난다는 그 한마디로
나와 상관없는 행복을 꿈꾸는 너.
- 임현정, "사랑은 봄비처럼...이별은 겨울비처럼"
그러나 정말로 그렇게 무관해질 수 있을까. 떠난다는 말 한마디로 서로의 삶이 완전히 상관없는 것이 될 수 있을까.
시간은 흘러가지만, 지나간 시간까지 지워지지는 않는다. 사랑은 스며들고, 이별은 남는다. 스며든 감정은 우리를 바꾸고, 이별의 시간을 지나며 얼굴도 달라진다. 우리는 그렇게 달라진 얼굴로 살아간다. 서로의 삶에 함께 서 있지는 않지만, 그 삶을 향해 조용히 안부를 건네는 마음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래서 서로의 행복이 완전히 무관해졌다고 말할 수도 없다.
그래서 영화는 마지막까지 단정하지 않는다.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조심스럽게 묻는다. 만약에 우리가 그때 조금만 덜 자존심을 세웠더라면. 조금만 덜 괜찮은 척했더라면. 조금만 먼저 말했더라면.
그 질문은 답을 요구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지나온 얼굴들을 오래 바라보게 할 뿐이다. 찬란했던 과거의 얼굴과 빛을 잃었던 시간의 얼굴을, 그리고 이별을 배운 지금의 얼굴까지. 그리고 우리는 그 얼굴들을 스쳐 지나며, 다시 각자의 자리로 걸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