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안에 남은 여름, 마음에 남은 기억

외할머니의 손맛과 지금의 나를 이어주는 여름 음식의 추억

by 이월규

여름이면 유독 생각나는 맛이 있다. 입 안 가득 퍼지는 된장찌개의 구수한 향, 아삭한 열무김치 한 젓가락,

그리고 아침을 여는 상큼한 레몬수 한 모금. 그 맛들은 내게 여름을 말해주는 풍경이자, 오래된 기억의 조각들이다.


어릴 적, 여름방학이 시작되면 나는 어김없이 외갓집으로 향했다. 그곳엔 도시에서는 느낄 수 없는 흙냄새와, 사람들의 정과 손길이 살아 있었다. 새벽녘이면 외할머니는 밭으로 나가 열무를 뽑아 오셨다. 뿌리에 묻은 흙을 털고,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다듬어 곱게 줄을 세우고, 새끼줄에 묶어 시장에 내다 팔 준비를 하시는 모습이 참 정갈했다.


집 안에는 늘 흙냄새와 채소 특유의 풋풋한 향이 가득했다. 새벽시장에 열무를 넘기고 돌아오는 길, 할머니는 빠짐없이 생선 한 손과 작은 주전부리를 손에 들고 오셨다. 그 작고 소소한 기쁨이 담긴 봉지 속엔 외손녀를 향한 마음이 담겨 있었다. 그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저녁이 되면 마당 한쪽에 멍석이 깔리고, 모깃불이 피워졌다. 그리고 어느새 부엌에선 된장찌개의 구수한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호박잎과 매운 고추를 송송 썰어 넣고, 마당 끝 텃밭에서 갓 따온 채소들을 넣어 끓인 된장찌개.


그 국물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깊은 맛을 품고 있었다. 시골 된장의 짭조름하고 특유의 구수한 향, 할머니 손끝에서 나온 정성이 가득 배어 있는, 어디서도 다시는 맛볼 수 없는 ‘그 집만의 맛’이었다. 이제는 다시 맛볼 수 없는 그 된장찌개가 문득 속이 불편한 날이면 유독 그리워진다.


그럴 땐 나도 모르게 된장찌개를 그대로 흉내 내서 끓여본다. 된장은 음식이라기보다 속을 달래는 소화제이자, 그 시절로 데려다주는 따뜻한 위로다. 비록 그때 그 맛은 아니지만, 그리운 손맛은 여전히 내 마음 어딘가에서 살아 있다. 그리고 그 기억은 오늘도 나를 다독인다.




요즘 나는 아침마다 나만의 시그니처 음료를 만든다. 레몬수에 매실청 한 방울, 그리고 오이 혹은 사과 슬라이스를 넣어 상큼함을 더한 한 잔. 얼음을 몇 개 띄우면 집에서도 카페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출근하는 아들에게 작은 텀블러에 담아 건네면 그 청량감 속에는 건강을 챙기려는 엄마의 마음이 담겨 있다. 레몬의 상큼함과 매실청의 은은한 단맛이 입안에서 부드럽게 어우러지며 기분 좋은 시작을 만들어준다. 가끔 탄산수를 넣어 변화를 주기도 하지만, 나는 물 대신 수분 보충용으로 이 음료를 더 즐긴다.


지치기 쉬운 여름 아침, 이 한 잔은 마음을 상쾌하게 깨우는 작은 의식이 된다.




요즘 젊은 세대들은 여름이면 시원한 밀면이나 냉메밀, 수박주스를 즐긴다. 가볍고 간편한 음식이 대세이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 세대는 오히려 뜨끈한 국물을 찾는다. 땀이 흐를수록 속은 따뜻하게 덥히고 싶어 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가끔 옥천의 시골 염소맛집을 찾는다. 기름기 없이 담백하면서도 깊고 진한 국물 맛. 오랜 시간 정성으로 우려낸 그 맛은 진짜 보양식이란 무엇인지를 몸으로 말해준다. 전통 그대로의 방식으로 끓여내는 그 국물은 한 숟갈 뜨는 순간 속이 풀리고, 뜨거운 국물을 넘길 때마다 온몸에 기운이 도는 느낌이 든다. 그 순간, 내 몸이 먼저 알아차린다.


‘아, 오늘은 제대로 보양했구나.’




식사를 마치면 근처 자연휴양림으로 향한다. 숲 속을 따라 천천히 걷다 보면, 진한 피톤치드 향이 폐 깊숙이 스며들고 계곡 따라 불어오는 바람이 지친 몸을 감싸 안아준다. 그저 걷기만 했을 뿐인데, 어느새 마음은 한결 가벼워져 있다.


한 끼 식사와 함께 걸은 숲길, 그 두 가지가 전부였지만 그 안에는 나를 돌보려는 마음이 담겨 있다. 먹고 걸으며 오래된 기억을 떠올리는 일. 그 모든 것이 내가 여름을 지혜롭게 보내는 방식이다. 그리고 또 새로운 한 주를 무사히 건너기 위해, 오늘처럼 속을 달래고, 마음을 다독인다. 그리운 맛과 함께, 기억 속 여름을 천천히 다시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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