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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한경 Apr 05. 2021

미술은 아름다움을 추구하지 않았다

회화가 미술의 역사를 주도한 까닭


3. 회화의 본질  

                    

프랑스 태생의 화가이자 미술 비평가인 모리스 드니(1870~1943)는 


회화란 전쟁터의 군마나 누드 또는 일화이기 이전에 본질적으로 어떤 질서에 따라 

배열된 색채로 뒤덮인 평면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고 했다. 


인상주의 미술이 프랑스에서 유럽 전역으로 확산돼가던 시기에 태어나고 활동했던 

모리스 드니의 위 말에 따르면 회화는,


전쟁터의 군마를 그린 것


 흉갑 기병들의 결투. 테오도르 제리코. 낭만주의     


누드


올랭피아. 에두아르 마네. 인상주의     


또는 어떤 일화들을


의심하는 도마. 미켈란젤로 카라바조. 바로크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 일리야 레핀. 러시아 리얼리즘     


그린 것이라고 정의 내리기 전에 


본질적으로 어떤 질서에 따라 배열된 색채로 뒤덮인 평면이라고 정의한다. 

모리스 드니가 내린 회화의 정의에서 전쟁터의 군마, 누드, 일화, 배열된 색채 등의 

설명 어구를 빼면 주어는 회화이고 서술어는 평면이다. 


주어 = 회화, 서술어 = 평면 그러므로, 회화는 곧 평면이다. 

당연히 참이 아니다. 

세상 모든 평면이 미술작품이 아니듯 회화가 곧 평면이라는 말이 아니다. 


러시아군과 싸우는 프랑스의 흉갑 기병들, 


관람객들을 도발적으로 바라보는 창녀처럼 표현한, 원래는 여신이며 올림픽의 

어원이 된 올림피아의 프랑스식 발음 ‘올랭피아’  


예수의 부활을 의심하는 도마가 예수의 몸에 난 상처 속에 손가락을 집어넣어 확인하는 일화를 바로크적 과장과 연극적인 구성으로 그린 ‘의심하는 도마’  


유배생활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그러나, 그 누구도 아들이자 아버지, 남편인 

한 혁명가가 무사히 돌아오리라고 상상조차 못 한 조우의 순간, 미묘하고도 다양한 

감정이 한껏 내리누른 분위기를 포착한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  등 


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지, 무엇을 그리고 어떻게 그렸는지에 앞서 


회화와 그 회화의 역사는 모리스 드니의 말처럼 어떤 질서에 따라 배열된 색채로 

뒤덮인 평면 즉, 2차원의 공간 위에 그려진 이미지라는 것을 의식하고 의도적인 

예술적 전략 하에 그림을 그리는 것이란 의미다. 


회화가 미술을 주도적으로 이끌어온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무엇보다 여타의 미술 장르보다 가성비가 좋다. 종이나 캔버스가 없더라도 평평한 

벽면만 있어도 창작을 할 수 있다. 구석기시대의 동굴 벽화로부터 교회나 궁전, 

무덤의 벽면 심지어는 집의 담벼락에도 그릴 수 있다. 또한 제작 도구를 상대적으로 

쉽게 구할 수 있으며 도구를 다루는 데도 용이한 편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회화의 바탕이 평면이라는데 그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세상은 평면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드넓은 평야, 바다의 수평선조차도 인간의 

시지각의 한계로 인해서 평면으로 보일 뿐이다. 현실 세계에서 완벽한 평면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평면은 수학이나 과학의 가설과 실험을 위해 만들어낸 인위적인 

가상의 공간일 따름이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지리학자이자 역사학자인 B.W 힉맨이 말한 ‘평면은 문명의 산물 즉, 인간이 자연과 세계를 경영하고 지배하고자 하는 필요에 의해서 발명된 공간이다.’라는 논지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회화는 

굴곡지며, 때로는, 평평해 보이는 자연의 일부분까지도 갈아엎을 듯 예측 불허한 

혼돈의 세상을, 밋밋하고 예측 가능하며 단조로운 평면 위에 표현해야 하는 

이율배반의 충돌이 빚어낸 너무나 인간적인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평면 위에 신들도 탄생시키고, 왕국을 세우기도 하고, 혁명의 밤을 밝히기도 

했을 것이며, 불쑥 수수께끼를 들이대기도, 몇 날 며칠 연모하던 사람의 모습을 그렸다 지우며 애태우기도 설레게도 하는 물질적 존재와 가상의 비물질적 존재의 

어디쯤이라는 그 애매모호함의 경계가 바로, 회화의 본질이라 할 수 있다. 

20세기 들어서면서 '이제 회화는 죽었다'는 사망 선고를 받고도 아직까지 

미술의 역사를 그려나가는 이유일 것이다. 


     

평면은 자연이 갖고 있는 지형의 다양성에 대한 추상적이고 인공적인 공간의 승리이다. 평면의 일부는 보는 사람에 따라 아름다움을 느끼기도 하고 차마 눈으로 보기 

괴로울 수도 있다. 평면은 문명화의 상징이자 살아 숨 쉬는 지구에 대한 인간의 

불경함의 표시이다. ‘평면’은 매끄러움, 굴곡 없음, 수평, 예측성을 암시하는데, 

이러한 속성은 이동성과 활동에 용이하며 사회적 경제적으로 효용을 갖추고 있다. 

그와 동시에 단조로움, 단일성, 동질성, 공(空), 부재, 결핍, 평범, 무미건조, 결함, 

지루함, 무료함, 심지어 죽음 등과 같은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 B.W 힉맨 <평면의 역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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