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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한경 Apr 05. 2021

미술은 아름다움을 추구하지 않았다

회화가 미술의 역사를 주도한 까닭


2. 인간의 조건 – 회화의 의미


     

인간의 조건. 르네 마그리트. 초현실주의     



구름 한 점 움직이지 않는 어느 가을 무렵 고요한 풍경이 유리창에 한 폭의 그림처럼 

르네의 마음에 들어왔다. 르네는 얼른 그리 크지 않은 캔버스와 이젤을 가져다 

창가에 세우고 담배 파이프를 입에 문채 가늘게 뜬 두 눈으로 재빠르게 

창밖의 풍경을 재단했다. 


‘가운데 서있는 나무를 캔버스 오른쪽에 위치시키고 앞쪽으로 난 황톳길을 하단에 

그리고, 왼편 참나무 숲 뒤 저 멀리 보이는 산을 조금 나오게 하고, 

뭉게구름이 가득한 하늘에 화면을 좀 넉넉히 할애해야겠어.’ 


오래된 마호가니 색 방문에 기대 천천히 공을 들여 완성한 자신의 그림을 바라보던 

르네는 문득, 


‘내가 그린 그림으로 가려진 저 뒤 풍경이 정말 존재하는 걸까?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그림 속의 나무가 아까 내가 바라봤던 창밖의 나무와 같은 나무인 건가?’ 


‘대체 나는 무엇 때문에 저 평평한 캔버스에다 그림을 그리는 걸까?’ 


한참 동안 캔버스와 창밖의 풍경을 번갈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있던 르네는 

다른 이젤 위에 아까 것보다 훨씬 더 큰 캔버스를 올려놓는다. 꺼진 담배 파이프에 다시 불을 댕긴 르네는 창밖 풍경을 그린 캔버스와 이젤이 가린 나머지 풍경이 포함된 

창문과 실내의 일부를 그리기 시작한다. 


나무가 있는 풍경을 그린 20호 정도의 캔버스는 바깥의 풍경과 정확히 겹치는 위치에 세워져 있다. 녹갈색 벨벳 커튼과 카펫의 일부가 드러나게 해서 생각에 생각이 

중첩되어 있는 수수께끼 마냥 그림 안에 그림이 그려져 있는, 투명한 창을 통해 바깥이 보이는 실내 풍경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나는 방에서 보면 바깥으로 나 있는 창문 앞에 서있는 그림에 의해서 가려지는 바로 그 풍경의 부분을 재현하는 창문 앞에 서 있다. 따라서 그림 안에 재현된 나무는 방의 바깥에 있는 나무를 가리킨다. 그 나무는 관찰자에게도, 동시에 그의 정신 안에도 존재한다. 나무는 그림 속에 있는 방안에는 물론, 실제의 풍경이 있는 저 바깥에도 존재한다. 우리는 그런 식으로 세계를 보는 것이다. 비록 그것이 우리가 스스로의 안에서 체험하는 정신적 표상에 불과한 것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우리의 바깥에 있는 존재로 본다.’ 

                                                             - 르네 마그리트 <인간의 조건>에 대해서



나무가 있는 창밖의 풍경은 화가가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상관없이 이미 그곳에 있었다. 화가가 그 실제의 풍경을 관찰하면 하나의 이미지로 화가의 정신 안에서 표상된다. 

그리고 그 표상된 이미지가 캔버스 위에 작품으로 완성되는 순간 ‘그 나무는 그림 속에 있는 방 안에는 물론, 실제의 풍경이 있는 저 바깥’에도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식으로 작품을 통해 세상을 본다. 


흔히 회화를 창에 비유한다. 창은 세상을 투명하게 선입견 없이 비쳐주지만 동시에 

창의 크기만큼만 보여준다. 인간의 시각적 능력은 창의 크기를 넘어서는 범위를 

볼 수 없다. 또한 한 번에 하나의 단면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동시에 여러 면을 보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러한 한계와 조건이 외부 세계와 화가 사이에 가로 놓여있다. 

하지만 평평한 바탕 위에 하나의 이미지가 발현되는 순간, 그것은 물질성을 갖는 

객관적 실재이며 동시에 비물질적 이미지로서 인간과 세계를 연결하는 

어떤 접촉면이 된다. 왜냐하면, 창은 내부이며 동시에 외부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시각적 한계와 조건 속에서 무한하며 입체적인 세계를 유한한 평면 위에 

표현해야 하는 모순의 충돌이 오늘날까지 회화가 미술의 역사를 추동해온 

근본적인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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