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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한경 Mar 27. 2021

미술은 아름다움을 추구하지 않았다

순수.천사. 노을에 대한 통념



순수. 천사. 노을에 대한 통념


1. 순수 미술이라는 불순함 - 순수 미술의 사전적 정의



말로든 문자로든 표현해야 할 무엇인가가 일관되게 잘 정리되지 않는다면 대체로 

우리는 사전을 찾아본다. 왠지 모르게 사전은 신뢰할 만하다는 모태 믿음 같은 것이 

있기 때문이다. 사실, 사전에 실려 있는 아주 간단한 낱말이라도 그 뜻과 쓰임새를 

제대로 기록하기 위해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야 한다. 또한 객관성과 가치중립성을 지녀야만 그 권위를 인정받을 수 있다. 해서 사전적 정의가 

‘옳다 틀리다’를 떠나서 사회 구성원 대다수가 인정하는 상식이라는 선에서 

정리해 놓은 것이기에 뭐든 애매모호한 것은 사전부터 찾게 되는 것 같다. 사전적 정의를 참고해서 기본적인 개념을 정리하고 넘어가는 것이 좋은 방법이긴 하지만, 사전을 만드는 것도 인간이며 인간은 결국 자신이 처한 시대적 한계와 계층과 계급의 이해관계를 반영할 수밖에 없다. 오점이 없을 것 같은 컴퓨터 백과사전인 AI도 인종차별이라는 커다란 오류를 범한 사례가 있었다. AI가 한 미인대회 참가자 6천 명 중에 44명의 

수상자 대부분을 백인으로 뽑았는데, 이는 AI에 데이터를 입력하는 자들의 대다수가 백인이었고 미의 기준을 백인으로 삼았기 때문이었다. 그 AI는 심지어 흑인의 사진을 동물로 인식한 웃지 못할 사례에 이르면 더 이상은 실수가 아닌 명백한 인종차별의 

의도를 입력했다고 간주해도 무방하다. 


아무튼 백과사전에 의하면, 미술을 개념적으로는 순수미술(회화, 조각)과 응용미술

(도예, 디자인, 건축 등)으로 분류한다.


네이버 지식백과에는 순수미술의 개념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순수미술(純粹美術, fine art)은 순수미의 구현을 위한 예술적 동기에 의하여 창조된 미술을 의미한다. 자율성과 독립성을 주장하며, 미술 자체 실재를 추구하고 목적하는 미술 지상주의적인 개념이다. 실용을 바탕으로 한 효용성보다는 절대적인 미(美)의 

추구와 미술 존재의 실존적 개념의 추구와 그 표현을 목적으로 하는 회화, 조각 등의 

미술(pure art)을 말한다. 


또 영어판 위키 백과사전에는 순수 미술에 대해 이런 설명이 나온다. 


In Western European academic traditions, fine art is art developed primarily for aesthetics, distinguishing it from applied art that also has to serve some practical function. (서구 유럽의 아카데미적 전통에서, 순수미술 fine art는 아름다움을 위한 예술이며, 실용적인 기능에 쓰이는 응용미술과는 구분된다.)



마치 회화, 조각은 세상 때가 하나도 묻지 않은 순수의 결정체여서 고상하고 고귀한 

사람들만 향유할 수 있는 특별한 것만 같이 느껴지고, 이와 달리 공예, 디자인, 

건축 등은 뭔가 상대적으로 열등하거나 하등 한 인상을 주는 순수, 실용(응용)이라는

 수식어를 굳이 붙일 필요가 있었을까? 사전적인 의미대로 해석을 한다면 미술은 미적인 것을 위해 발전 (developed)되어 온 순수미술이든, 실용적인 기능 (practical function)을 위한 응용미술 (applied art)이든 무엇인가를 위한 어떤 것이다. 다시 말해서 순수미술인 회화, 조각은 아름다움을 위한 것이고, 응용 미술인 공예, 디자인, 건축 등은 실생활을 위한 것이라고 분류해 놓았지만 둘 다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목적을 위한 수단인 것이다. 


현재까지도 서양미술의 고전(모범)으로 떠받들고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그리스 시대에는 오히려 예술을 일종의 실용적인 기술로 취급했다. 심지어 플라톤과 같은 철학자는 예술가를 아름다움의 원천인 이데아를 모방해서 생겨난 자연, 인간, 사물 따위를 또 

모방 – 그대로 따라 그리거나 조각 - 이나 하고 있는 하등 한 부류들로 낙인을 찍고 

이상적인 국가 건설에 해로운 자들이라 천대했을 정도였다. 미술=art의 라틴어 어원 ars는 ‘조립하다, 제작하다’라는 의미이고 그리스어 ‘techne’에서 유래했으며, ‘techne’는 지금의 ‘technic’으로 실용적인 것들을 생산하는 기술을 나타냈던 것이었다. 결국 미술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닌 ‘균제의 아름다움’이나 ‘교육과 선전의 수단’ ‘실생활의 보조재’ 따위의 수단으로써의 역할을 했다는 말이다. 

그런데 언제부터, 왜 미술이라는 말 앞에다 순수, 실용이라는 수식 어구를 붙였을까? 


18세기 유럽 사회는 프랑스 대혁명과 산업혁명으로 급격한 도시화와 함께 새로운 

계급과 계층들이 생겨나고 특히, 신흥 중산층은 기존의 귀족과 대지주들의 지위를 

크게 위협하는 세력으로 성장한다. 부르주아와 도시 노동계급, 도시빈민층은 급격한 

변화에 맞는 새로운 문화를 형성하고 있었고, 이에 위협을 느낀 귀족이나 

지식인층에서는 이들과 자신들의 문화를 분리시키려는 차별화 전략을 세우는데 골몰한다. 이에 따라 미술계도 순수미술과 실용미술의 구별이 보다 엄격해진다. 1747년, 

프랑스 평론가 찰스 바퇴 Charles Batteux가 순수예술과 비순수 예술로 구분 짓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순수예술에 회화, 조각과 함께 음악, 시, 무용을 포함시키기도 했다. 영국에서는 1767년에 순수 미술을 가리키는 ‘fine art’라는 말이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19세기에 이르러서 유럽 전반에 걸쳐 회화, 조각이 순수미술 fine art로 남게 되었고 

이것이 지금까지 우리가 배우고 있고 알고 있는 미술의 개념적 분류에 가장 근접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대중문화 (mass culture)라는 말도 실은 귀족문화와 구분 짓기 위해 어용 지식인들이 만들어낸 용어이다. 18세기에 만들어진 대중문화라는 이 인위적 용어는 결국, 귀족의 반열에 끼어들고 싶어 하는 부르주와 계급에 적극 수용되어 노동자를 비롯한 기층 민중들의 저급한 문화를 나타내는 용어로 오늘날까지 통용되고 있다.


이처럼 언어는 가치중립적이지 않다. 언어 자체는 중립적 일지 몰라도 그 언어를 만들고 사용하는 인간들이 중립적일 수 없기 때문이다. 빌헬름 폰 훔볼트는 그의 저서 

<카비 말 연구 서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간은 오로지 언어가 대상의 표상을 그에게 제시하는 대로 사는 수밖에 없다. 인간 스스로가 언어를 조직해내는 바로 그 행위를 통해 인간은 자기 자신을 

언어 속에 짜 맞추어 넣는다.’ 


일반적으로 ‘근면’ ‘성실’이라는 단어는 가치중립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근면’과 ‘성실’이라는 언어가 식민지의 공공기관에 표어로 쓰이는 순간, 그것은 중립성을 멈추고 식민지인들의 사고와 행위를 규정하는 제국주의의 문화적 침투 전략이 되는 것이다. 


18세기 유럽의 상류 사회에서는 왕조의 몰락과 더불어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귀족들과 어용 지식인, 문화예술인들은 여러 자구책들 중 하나로 순수, 실용이라는 

불순한 용어를 만들어 냈다. 미술, 음악, 시 등의 앞에 붙는 ‘순수’라는 단어가 내포하고 있는 언어적 차별성은 근대 이후 작가와 작품들에 ‘천재’ ‘독창성’이라는 의미가 

더해지면서 일반적인 삶과는 완전히 유리되는 과정을 거친다. 그리고 마침내 

‘예술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냐. 잘 알 수는 없지만 타고난 무엇이 있어야 해. 천재들만이 가능한 능력이지. 예술가들의 생각과 삶 그리고 그들이 창작해낸 작품은 보통 사람들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신비의 영역이야.’라는 근대적 천재론이 대두되어 

예술가를 ‘신성’의 위치로까지 밀어 올리며 배타적 영역을 형성한 채 

현재에 까지 이르고 있다. 


순수 미술, 응용미술이라는 용어의 인위적 발명과 확산은 결국 미술을 그저 

잠시 쓰였다 사라지는 시대적 도구로 전락시켜버렸으며 오히려, 예술가들을 한낱 

비주체적 어용으로 만들어 버리는 오류를 범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을 틀어쥐고 있는 권력 계층의 자기 강화를 위한 끊임없는 구획 짓기와 밀어내기 속에서도 - 시대를 대표하는 예술가들은, 예술을 둘러싼 시대적 조건과 한계라는 액자와 좌대를 

타개하기 위한 다양한 모색과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끊임없는 실패와 좌절을 

견디며 언제나 전위적인 작품을 남겼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들은 모두 

시대가 낳고 시대를 뛰어넘는 천재였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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