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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한경 Mar 26. 2021

미술은 아름다움을 추구하지 않았다

미술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미술이라는 용어 이전에 <미술> 작품의 역사가 있었다 1



이집트 미술부터 사실주의까지


인간의 역사와 불가분의 궤적을 그리며 이어져온 미술의 역사에 있어서 어느 특정시기에는 양식(style)상 전혀 이질적인 모습을 띠기도 한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근대 

이후의 미술계에만 해당하는 일이 아니다. 사냥을 위한 구석기시대 동굴벽화의 사실주의적 재현 양식과 농사를 위한 신석기시대의 추상적 양식 사이의 간극은 완전히 불연속적이며 단절적이다. 이처럼 가장 근접한 시기의 미술이 가장 이질적인 양상을 보이는 것은 사실, 그 중간 과정의 흔적을 오늘날 전혀 찾아볼 수 없다는데 기인한다. 하지만 구석기시대의 사실적 재현은 먼 훗날 그리스와 르네상스 시기의 고전적 사실주의 

미술로, 신석기시대의 추상적 단순화의 능력은 현대의 추상주의 미술로 되살아난다. 

이처럼 미술은 <미술>이라는 용어로 불리기 이전부터 새로운 양식이 과거의 양식을 영구 폐기 처분하며 오늘날에 이른 것이 결코 아니다. 선사시대의 어두운 동굴 바깥으로 나온 미술의 역사는, 각 시대의 조건과 한계라는 액자와 좌대가 요구하는 무수한 작품과 작가들의 역사이며, 그러한 틀을 부수고 세우는 생성과 소멸 과정의 

반복이라 할 수 있다. 


구석기와 신석기 초기의 평등하던 공동체가 상하의 계급으로 나뉘고, 초월적인 신의 존재를 믿기 시작한 신정일치의 고대 노예제 국가들이 출현하면서 본격적인 역사 시대가 막을 열면,



대규모 농경을 위한 치수사업이 국가적 차원에서 일어났으며, 육로와 수로, 해상 등을 통한 각종 무역업이 발달하면서 경제활동의 규모와 방법이 선사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에 이르게 되었다. 원시적 형태의 소유관계가 국가적 차원으로 발전해나가면서 약탈 전쟁이 빈번해지고 이에 따른 권력체계와 계급제도가 보다 복잡하고 

정교해진다. 달라진 생산양식과 정치경제적 시스템을 뒷받침하기 위해 자연의 섭리와 우주의 운행에 관한 고도의 추상적 사고와 연구가 진행됨에 따라 영혼불멸이나 

이데아 같은, 유한하고 불안정한 인간 세상과는 다른 차원에 대한 이원론적 사고방식이 자리를 잡는다.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에 있어서 생존을 위한 단순한 기록과 정보의 

집적물이었던 미술이 본격적으로 국가의 정체성을 강화하고 인민을 교화시키는 

지배 이데올로기로써 이집트와 그리스 미술이 발전해갔으며



황금 의자. 이집트 미술  


아킬레우스와 펜테실레아의 전투. 그리스 미술    



기원후 313년, 기독교가 공인되면서 유일신과 교황을 중심으로 하는 일원론적 기독교 사상이 다신교적 다원론적 세계관의 흔적들을 지워나간다. 유일한 지배 이념이 된 

기독교를 빠른 속도로 전파하기 위해 미술은 성서의 말씀과 교리를 가르치는 최전방의 교육수단으로 활용된다. 그리스 로마 시대에 꽃 피우고 널리 퍼졌던 일체의 물질적이고 감각적 표현 방법이 철저히 배제되었으며, 평면적이면서 딱딱하고 엄격한 

중세 초기의 미술 양식이 르네상스 이전까지의 미술 창작의 중심 이론이 되었다.


오병이어의 기적. 6세기 초. 모자이크화. 중세 미술


최후의 심판. 프라 안젤리코. 중세미술    



유럽 인구의 3분 2를 죽음으로 몰고 간 페스트의 대유행과 이슬람 제국의 침공으로 

 동로마제국이 멸망한다. 그로 인해 그리스 로마 문화의 유입,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하는 해상 무역과 상업의 발달 등은 인간과 자연, 우주의 원리와 법칙에 대한 과학적 

관심을 증폭시키고 예술과 인문학이 꽃피게 된다. 특히, 원근법의 발견은 평면적인 

중세 양식에 깊이와 양감을 불어넣어 물질적 생동을 되찾으며 이탈리아를 시작으로 

전 유럽에 걸쳐 미술의 르네상스 시대를 열게 된다.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전 유럽에 걸친 신교의 확장세와 날로 강화되는 제왕들의 권력이 서로마를 중심으로 하는 구 가톨릭을 위기에 몰아넣게 되자, 교황과 교단이 앞장서서 자연과학과 그리스 로마의 철학, 예술 창작 방법 등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기독교 사상과의 융화를 

대대적으로 장려하는 아이러니가 빛과 어둠의 극적 대비, 연극적 포즈와 과장의 

바로크 미술로 이어진다. 


방울새의 성모. 라파엘로. 르네상스     


비너스의 탄생. 보티첼리. 르네상스 


니콜라스 울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 렘브란트. 바로크 


베드로의 순교. 카라바조. 바로크     



‘짐이 곧 국가다’


유럽 대륙의 2등 국가를 면치 못했던 프랑스가 스페인과 오스트리아와의 주도권 

다툼에서 승리를 거두며 절대 왕정 시대를 열게 된다. 하지만 태양왕 루이 14세의 

죽음과 함께 절대 왕정에 억눌려있던 귀족 계층이 흔들리는 제왕 체제를 틈타 왕실의 권위를 지킨다는 명목 하에 화려하고 장식적인 귀족 문화를 만들어 나간다. 그리하여 인간적인 감성과 관능, 그리스 로마 시대에 대한 복고적인 향수, 탐미적 취향을 반영한 프랑스 왕조시대의 로코코 미술이 잠시 동안 피어난다.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 그네. 로코코    


마리 루이 오 머피. 프랑수와 부셰. 로코코     



18세기에 이르러 세상만사를 합리적인 정신(이성)으로 통제하고 조절할 수 있다는 

계몽주의 철학의 세례 속에 새로운 시민계급이 형성된다. 산업혁명으로 인한 공장제 생산의 발달, 도시와 상업과 무역의 비약적 발전은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계급의식에 눈을 뜨게 하는 가운데 부패와 타락, 탐욕이 극에 달한 군주와 귀족들을 타도하자는 

프랑스혁명이 발발한다. 급속도로 발전해가는 도시를 둘러싼 여러 계급 계층의 분화된 욕구는 도처에서 다양한 쟁점들을 불러일으킨다. 미술계에서도 짧은 시기 동안 

화려하게 피었던 로코코 미술이 화무십일홍처럼 스러지니 아주 오랜 기간 단일한 사조와 양식이 주도하는 대신 신고전주의, 낭만주의, 사실주의 등 근대 미술의 길을 여는 세 가지 유파가 연이어 일어난다. 


테니스코트의 서약. 자끄 루이 다비드. 신고전주의     


메두사호의 뗏목. 테오도르 제리코. 낭만주의    


돌 깨는 사람. 쿠스타프 꾸르베. 사실주의     



그리스와 르네상스의 고전주의를 계승한 신고전주의 미술은 혁명과 왕정복고의 대열을 넘나들었고, 시대의 대전환과 마주한 인간의 불안한 감정과 정념 등을 강렬한 색채, 

독특하고도 이국적인 소재, 역동적인 구도로 표현한 낭만주의 미술이 대세를 이루는 

가운데,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 미술이 터무니없는 내용과 표현방식으로 현실을 

외면한 채 권력을 비호하고 인민들을 기만하다는 반발로 일어난 사실주의 미술– 고전적 사실주의와 대립하는 저항적인 의미가 포함된 리얼리즘 미술 –을 낳으며 비로소 

근대 미술의 대문이 활짝 열리게 되었다.


<미술>이라는 용어가 발명된 근대 시기의 화가들만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탈 역사적 

천재 행위로써의 미술을 한 것이 아니라 다만, 19세기 인상주의 이후, 미술의 백가쟁명 시대의 태동을 예고하는 자신들의 역사적 소명을 다한 것일 뿐이다. 

사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에서부터 19세기 중엽에 이르는 천재들의 탄생 시기는 

인류 역사상 가장 참혹한 약탈 전쟁이라는 또 다른 야만의 시간들을 잉태하고 있었다. 기독교 권위주의와 봉건제를 무너뜨린 자유로운 근대적 인간들은 식민지를 둘러싼 

제국주의의 진영 싸움에서 그 누구도,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 조차도 

자유로울 수 없었으며 이후, 

진정한 <미술>은 자의든 타의든 미국이 주도하는 초거대 자본주의 시장에 흡수되고 

거래되는 결과를 낳고 있다. 근대 이후, 미술가들이 미술에 있어서 목적성과 실용성을 지운 순수한 창작의 결과물을 만들어 냈다 하더라도 결국 자본주의라는 

‘보이지 않는 거대한 제도’에 좌지우지될 수밖에 없는 처지가 현실이다. 

손바닥으로 해를 가린 

그 자유로운 작품들이 루브르 박물관, 사치갤러리, 테이트 브리튼, 뉴욕 현대미술관의 흰 벽면 위를 장식하고 있다는 것이 이를 명증 한다. 자유로운 근대적 주체가 생산해낸 진정한 미술이라는 것도 결국, 반시민적 제도와 틀의 지속화라는 

앙시앵레짐 (구체제, 봉건제)의 도전에 대한 응전으로 이룩해낸 역사적 산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미술이라는 것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미술가들이 있을 뿐이다.’ 


미술사학자 에른스트 곰브리치의 <서양 미술사> 서론 - 미술과 미술가들에 관하여 - 

에 나오는 첫 번째 문장이다. 


언어는 추상적 기호다. 인간의 의식 밖에 객관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곰브리치가 미술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으며, 다만 분명하게 존재했었고 존재하고 있는 미술가들과 그들의 작품들이 있을 뿐이라 한 것은 언어의 추상적 유희를 피하기 위한 적절한 지적이라 할 수 있다. 꽃이라는 언어로 불리는 꽃은 이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진달래, 개나리, 장미, 수선화, 나팔꽃, 해바라기라 불리는 개별적인 식물들만이 존재할 뿐이라는 말이다. 


소크라테스가 대화를 통해 세상과 인간의 문제에 대한 판단을 유도해내는, 소위 산파술이라 불리는 대화법을 우리는 ‘철학한다’ 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가 여러 사람들과 나눈 대화 내용을 정리하면서 자신의 이데아론을 펼친 플라톤이 <국가>나 <향연> 등의 철학서를 쓰지 않았다면, 과연 서양 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소크라테스가 

철학했음을 알 수 있을까?  다시 말해서 우리는 인간과 세계의 문제에 대한 깊은 생각과 해결 방법 제시 따위를 기록한 각종 철학서를 통해 어떤 철학자가 철학했음을 

알 수밖에 없으며, 후대에 이르러 그런 철학서들을 학습하고 연구하는 소통의 전 과정을 통틀어 철학이라 부른다. 마찬가지로 기술이란 학문도 자연자원을 가공해서 생활에 필요한 여러 가지 기기, 설비시설 등을 만들고 사용함으로써 그리고 그 원리와 결과물들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연구하고 기록하는 논문 등을 통해 기술이라 불리는 학문이 

존재하듯, 미술 또한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인간이 예술 활동을 하고 있음을 드러내고, 그 드러난 결과물들로 인해 미술, 예술, 미학이라는 용어와 학문이 탄생했던 것이다. 


곰브리치는 덧붙여 말한다.


‘미술이라는 단어는 시대나 장소에 따라 전혀 다른 것을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서양의 이성 중심의 세계관이 철저히 파괴돼버린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마르셀 뒤샹과 같은 일군의 예술가들이 일으켰던 반 전통, 반 예술운동인 다다이즘이 일어났다. 모든 전통적 세계관을 파괴하고자 했던 다다이즘 운동 이후 우리가 흔히 

알고 있고 배워왔던 미술만이 더 이상 전부가 아닌 것이 되었다. 전통적인 회화나 조각의 기준으로는 예술작품이라고 인정할 수 없는 ‘제3의 장르’가 만들어진 것이다. 

그렇지만 그러한 부류의 작품이라 하더라도 철학, 음악, 의학, 기술, 스포츠라고 불릴 수 없고 반드시 <미술>이라 해야만 하는 것은 <미술>이 아닌 분야의 것들과는 다른 조건, 다른 도구와 표현방법을 이용하는 제작과정을 통해 그 결과물이 만들어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 때문이다. 또한 전통적인 창작 방법, 결과적 형식이 다르다 하더라도 

작품이 소통되는 것은 결국 미술계를 통해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렇게 만들어진 작품과 그 작품들이 감상되고 평가를 받는 전체 과정을 ‘미술’이라는 용어로 명명하자고 사회적으로 약속했고, 공인된 시기가 대략 프랑스혁명을 전후한 

근대 시기였던 것뿐이다. 


<미술>은 과학적 이론이나 기술처럼 단선적인 진보 개념으로 설명할 수 없는 

다시 말해서, 현재의 미술이 과거의 미술이 갖고 있는 오류, 단점, 한계 등을 극복하고 용도 폐기함으로써 오늘날에 이른 것이 아니다. 따라서 종교화 이외에 개별적인 인물화나 자연과 동물 등만을 따로 그릴 수 있게 된 르네상스 시기부터 창작된 것만을 미술이라고 부를 수 있다든지, 자유로운 개인에 대한 최초의 각성이 일어난 프랑스혁명을 

기점으로 창작된 근현대 시기의 작품들만 진정한 미술이라는 몇몇 이론가들의 주장은, 장미라는 이름이 정해진 이후에야 비로소 수많은 종류의 장미라는 식물이 존재한다는 의미론 혹은 관념론자들의 말장난에 그야말로 의미를 입힌 것에 불과한 것이다. 구석기시대의 동굴 벽화가 발견된 이후, 수 만년이 지나며 시대와 지역에 따라 표현 방식 – 사조와 양식 - 이 무수히 바뀌었어도 현재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여전히 그 모든 것을  

<미술>이라 부르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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