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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한경 Mar 27. 2021

미술은 아름다움을 추구하지 않았다

순수. 천사. 노을에 대한 통념


2. 나에게 천사를 보여달라 - 구스타프 쿠르베


‘내가 천사를 그리기를 원한다면 나에게 천사를 보여 달라. 그러면 천사를 그리겠다.’ 


나폴레옹 3세가 그의 작품 <목욕하는 여인들>을 보고 여성의 몸을 너무 사실적으로 

그려 추하기 짝이 없다는 이유로 채찍을 내리쳤다는 일화가 있는, 19세기 프랑스 

사실주의 화가 구스타프 쿠르베가 신고전주의 화가 앵그르에게 한 말이다. 

쿠르베에게 천사는 이상화된 아름다움, 상상 속의 아름다움일 뿐이다. 쿠르베가 보기에, 현실에 존재할 수 없는 인물과 사건들을 직접 보지도 않고 상상을 통해 그리는 

신고 전주 의자들이나 낭만주의자들은 현실을 외면할 뿐만 아니라 서슴없이 왜곡하거나 조작을 일삼는 거짓말쟁이들이었던 것이다.  


쿠르베는 1849년에서부터 1850년까지, 약 2년간에 걸쳐 자신이 태어난 프랑스 동부의 작은 시골 마을 오르낭에서의 장례식 풍경을 그린다.  


오르낭의 매장. 구스타프 쿠르베. 사실주의    


가로 6미터, 세로 3미터가 넘는 캔버스에 거의 실물 크기로 아무개 농부 혹은 

자신의 아버지라 알려진 그저 평범한 마을 사람의 죽음을 애도하는 장면을 그린 

유화 작품이다. 그림 속에는 성직자들과 아낙네들, 아이들을 비롯하여 40여 명의 

사람들이 실물 크기로 제각각의 상념에 젖은 표정과 움직임이 거의 없이 마치 병풍처럼 펼쳐진 구도로 표현되어 있다. 당시에는 가로 6미터 세로 3미터가 넘는 대형 캔버스의 크기는 일반인에게는 할애될 수 있는 공간이 아니었다. 영웅이나 위인과 신들의 일화에 얽힌 역사화를 그릴 때만 허용되는 특권이었다. <오르낭의 매장>이 발표되자 당연한 

비난과 찬사가 동시에 일어났다. 찬사를 보내는 쪽은 쿠르베가 <오르낭의 매장>으로 

구습과 구태에 젖어있던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에 일격을 가했다고 환호했으며, 

반대편에서는 평범한 농부의 죽음에 신이나 영웅들에게만 쓰일 수 있는 크기의 

캔버스를 할애함으로써 그들과 동등한 지위를 부여했으며, 그것도 신만이 주관할 수 

있는 죽음이라는 엄숙함에 부합하지 않는 사실적인 표정과 포즈들을 취하고 있다고 비난을 퍼부었다. 비난하는 쪽이 생각하기에 적어도 죽음에 관련된 작품 속의 인물들은, 신고전주의나 낭만주의 화가들의 작품에서처럼 과장된 표정과 자세를 취함으로써 

연극의 한 장면 같은 연출을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소크라테스의 죽음. 자크 루이 다비드. 신고전주의    


사르디나 팔루스의 죽음. 외젠느 들라쿠르와. 낭만주의    



국가가 주관하는 <살롱전>에 출품할 정도의 작품에서 다뤄야 할 죽음의 순간에는 

신과 맞먹을 정도의 영웅이나 위인이 주인공으로 등장해야만 한다. 따라서 다비드와 들 라크루와의 작품에서 볼 수 있듯이, 비극의 주인공들을 돋보이도록 최대한 극적인 

자세와 구도로 표현해야 하는 준칙을 반드시 따라야만 했던 것이다. 하지만 쿠르베는 이러한 구태를 전면적으로 부정한다. 쿠르베가 그린 <오르낭의 매장>에서 보듯, 비극의 주인공은 이미 땅 속에 들어가 화면에는 등장하지도 않고, 배경과 잘 구분되지 않는 어두운 색조의 의상과 딱딱하게 굳어버린 포즈, 음울한 표정의 참석자들로 이루어져 

있다. 기존 미술계의 관행을 장려하고 후원하는 이들에게 쿠르베의 <오르낭의 매장>은 자신들이 구축해놓은 세상에 대한 위협이자 도전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18세기에 일어난 신고전주의 미술과 낭만주의 미술에 있어서의 왕족이나 귀족, 영웅들과 위인들의 죽음에 대한 극적 구성과 표현은, 저 멀리 고대 그리스와 르네상스, 바로크 시대를 이어온 신성 불가침적 대상에 대한 구별 짓기와 같은 전통 선상에 놓여있다. 소크라테스는 죽는다. 오르낭의 농부도 죽는다. 소크라테스와 농부는 인간이다. 모든 인간은 죽는다는 귀납법적 일반화를 통해 자신들의 위치를 하층계급의 무덤 속으로 

끌어내리려 하는 쿠르베의 시도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오만과 불경이었다. 


하지만 쿠르베에게 낭만주의적이거나 신고전주의적인 작품들과 그들이 전통으로 삼고 계승한 전대의 모든 미술은, 지배계층과 그들의 저열한 취향에 대한 영합일 뿐이었다. 숭고하거나 비장한 아름다움 혹은 순수한 내면의 아름다움을 표현한다는 미명 아래 

거짓된 천사를 만들어 민중을 기만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쿠르베는 자신의 미술작품을 통해 기존 미술계를 비판하기는 했지만, 

동시대의 오노레 도미에만큼 본격적으로 부조리한 현실에 맞서거나 저항할 만한 

내용의 작품을 만들어낸 것은 아니라는 한계를 보인다. 그럼에도 쿠르베를 통해 우리는 미술이 과연 아름다움을 추구해왔는지 또는, 미술이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해 태어난 것인지 다시 한번 냉정히 돌아볼 필요를 제기하고 있다.  


가르강튀아. 오노레 도미에. 사실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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