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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한경 Mar 29. 2021

미술은 아름다움을 추구하지 않았다

순수. 천사. 노을에 대한 통념


미술이라는 용어 이전에 <미술> 작품의 역사가 있었다 2



인상주의부터 초현실주의까지


오늘날 우리가 미술에 관한 담론을 형성하는 것은 한 시대의 대표적인 미술 양식들이나 사조를 형성한 작품들을 통해서이다. 또한 그것들은 우연히도 입구가 밀봉된 동굴 깊숙한 곳에 그려져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역사 시대 이후 지배계층의 필요에 의해 생산되고 잘 보존되어 온 덕분이다. 미술에 관한 여러 담론들이 있겠지만, 구석기시대 동굴벽화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미술에 따라붙어 있는 가장 논쟁적인 담론은 아름다움이라는 개념에 관한 것이다. 하지만 근대 이전까지 미는 최하위 개념이었으며 때로는 오늘날과 전혀 다른 의미로 쓰였다. 해서 아름다움이라는 용어 앞에는 늘 균제, 숭고, 비장, 골계, 우아 같은 수식어구가 따라붙는다. 그리스 시대에 있어서도 미는 

진리와 도덕이 완성될 때 비로소 느끼는 부차적인 감정일 뿐이었다. 


아름다움이라는 미적 감정이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는 근대 시기에   발맞춰 미술계에서도 제도권 밖으로 나오려는 유파들이 우후죽순 생겨난다. 서양미술사에 있어서 

일체의 권위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운 창작을 하던 19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의 시기를 ‘좋았던 옛날’ 또는 '아름다운 시절'인 <벨 에포크 La Belle Epoque>라고 부른다. 

이 시기의 미술가들과 미술은, 오랜 시간 동안 내용이 형식을 만들어내고 지배하며 그 내용과 형식에 또 다른 틀을 씌워오던 제도와 지배질서의 감옥으로부터 벗어나 해방과 자유의 기쁨을 거침없이 분출한다. 하지만 자유의 대가는 값비싼 것이었다. 그들은 늘 굶주림과 예술가로서의 생존과 출세의 불안에 떨어야 했던 시기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인상주의 미술의 출현을 전후한 <벨 에포크>는 3차례에 걸친 프랑스혁명과 

산업혁명을 이어 자본주의가 제국주의로 심화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농업을 경제활동의 근간으로 삼던 봉건제가 완전히 무너지고 대량생산체제를 기반으로 하는 국가 경제의 비대화와 불균형이 생산원료와 제3세계의 값싼 노동력을 약탈하기 위한 식민지 쟁탈전을 앞두고 있었던 것이다. 자유를 넘는 방종에 가까운 유럽 사회의 풍조는 세기말적 

징후들과 함께 미술계에도 영향을 미친다. 낭만주의 미술이 유럽 각 나라들의 특색에 따라 여러 유형으로 발전한 것처럼, 인상주의 이후의 미술 역시 기존의 보수적인 

미술계의 관행에 반발한다는 점을 공통적인 매개로 유럽 각 지역마다의 사회문화적 

특색을 바탕으로 저마다의 개성들이 한껏 드러나는 다양한 유파로 피어난다. 


국가의 지배 이념에 부합하는 제도적 규정으로 미술가를 양산해내던 <살롱전>과 같은 관제 미술에 반발한 일단의 젊은 화가들이 자유로운 일상을 주제로 삼아 빛과 색채의 향연을 펼치며 폭발적인 양상의 모던 아트의 물꼬를 튼다. 인상주의 미술은 기자이면서 비평가인 루이 루르아가, 카미유 피사로의 <하얀 서리>라는 작품을 보고 ‘캔버스 위에 팔레트 부스러기를 뿌린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인상 impression은 남아있네’라는 조롱과 더불어 모네의 <인상 –일출>을 염두에 두며 기고한 평론 덕분에 붙여진 이름이다. 하지만 정작 인상주의 화가들은 인상주의란 용어를 좋아하지 않았다.


하얀 서리. 카미유 피사로. 인상주의    


인상-해돋이. 모네. 인상주의     


물랑드라 갈레트의 무도회. 르느와르. 인상주의

    

 

발흥하는 배타적 민족주의 - 나치즘, 파시즘 -과 전쟁의 참화를 피해 파리로 모여든 

이국의 화가들, 자유분방한 생활과 창작을 이어나가던 작가들이 몽파르나스를 중심으로 작품 활동을 펼쳐나간다. 그들은 여러 유파의 형식을 차용하기는 했지만 

그러한 그룹들이 추구하는 방향과 내용에 완전하게 동조하지는 않았다. 이탈리아에서 건너온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같은 경우에는 입체파의 영향을 받기는 했지만, 

입체파 화가들이 인간과 세상에 대한 진실 추구를 도외시한 채 조형적인 방법론에만 

몰두한다고 비판하며 자신과 입체파를 함께 거론하는 것을 싫어했다고 한다. 

이러한 이유 등으로 후대에 에콜 드 파리 – 일명 파리파 –라고 명명했는데, 

짙은 우울이 배어나는 흰색의 마술사 모리스 위트릴로를 비롯해, 모딜리아니, 

리투아니아 출신의 카임 수틴과 폴란드의 모이즈 키슬링. 러시아에서 온 마르크 샤갈 등이 바로 그들이다. 그들은 각자만의 독창적인 방법으로 타향살이의 고난, 

고국에 대한 그리움과 인간과 세상에 대한 연민, 불안과 공포 따위를 표현주의적으로, 때로는 초현실적으로 그렸다. 


몽파르나스의 키키. 모이즈 키슬링. 에콜 드 파리    


두유 마을의 교회. 모리스 위트릴로. 에콜 드 파리    


쟌느 에뷔테르느.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에콜 드 파리    


도살된 소. 카임 수틴. 에콜 드 파리    


바이올린 연주자. 마르크 샤갈. 에콜 드 파리

    


‘사과 하나로 파리를 놀라게 해 주겠다!’


인상주의 이후 현대 미술의 귀감이 된 세잔은 사물의 본질과 진실은 단순히 그 외관을 보고 그리는 것만으로 드러낼 수 없으며, 원, 원기둥, 원추와 같은 근본적인 형태소를 

중심으로 재구성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인상주의에 영향을 받은 세잔은 사과를 통해 빛과 색의 중요성을 부각하면서도 인상주의가 갖는 불명확성과 무상함 같은 것을 

극복하고자 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모든 사물은 현상적으로 끊임없이 변화하지만, 

사물들 간의 경계와 구분을 할 수 있는 본질적인 불변 원리가 있다는 생각을 기하학적 형태소로 치환하는 작업에 평생을 천착했다. 


사과가 있는 정물. 폴 세잔. 후기 인상주의    


또한 인간의 시각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하나의 사물을 여러 각도에서 본 후 

화면에 조화롭게 재구성하는 방법을 고안했는데 이는 후에 

입체파 미술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바구니가 있는 정물. 폴 세잔. 후기 인상주의 


세잔의 <바구니가 있는 정물>을 자세히 보면 탁자, 과일들, 바구니, 주전자, 

의자 등이 있는 실내를 그린 것인데, 세잔의 다른 그림들과 마찬가지로 입체도형을 기본 단위로 채색한 이유에서인지 전체적으로 매우 단단해 보인다. 또한 작가의 단일한 시점에서 그린 것이 아니라 여러 시점에서 바라본 대상을 한 화면에 조합한 것을 알 수 있다. 흰 천으로 가려진 탁자도 언뜻 일정한 시점인 것 같지만 탁자의 왼쪽 편은 오른쪽보다 좀 더 위에서 바라본 것이며, 과일이 들어있는 바구니는 정면에서 바라본 것이라면 바로 옆에 있는 주전자는 상당히 위쪽에서 바라본 시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다양한 각도의 시점에서 바라본 사물을 한 화면에 조화롭게 재구성하는 방식은 입체파 미술에 영향을 끼쳤는데, 사실 이는 이집트 미술의 <정면성의 원리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이집트 미술의 <정면성의 원리>는 신과 동등한 지위와 맞먹는 왕의 존엄과 영생불멸을 표현하기 위해 얼굴은 옆면, 가슴은 정면, 손가락은 엄지를 포함해서 

언제나 다섯 개가 다 보이게 그리는 등 신체의 각 부분들을 완벽하게 보일 수 있도록 

재배치한 것이다. 



영국의 화가이자 평론가인 로저 프라이가 기획한 전시회의 명칭 

<마네와 후기 인상주의자들> 때문에 후기 인상주의로 불리지만, 각자의 개성과 

독창적인 화풍은 또 하나의 에꼴 드 파리라 불러도 무방한 일군의 화가들이 있었다. 

작품 활동 초기에 인상주의의 영향 하에 있었던 그들은 노동자와 농부, 술과 몸을 파는 여인들 같은 가난하고 소외된 계층을 주로 화폭에 담았다. 드가가 그린 우아하고 

부드러운 색채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발레리나들은 당시 파리에서 유행한 발레의 여자단원을 채우기 위해 모집한 가난한 집안의 딸들이었다고 한다. 간혹 그림 속에 발레 

연습을 바라보고 있는 신사들이 등장하는데 그들은 발레리나를 돈으로 산 

소위 ‘스폰서’들이었다. 이밖에도 유럽 문명에 대한 회의와 환멸을 뒤로한 채 타이티로 떠난 고갱은 원시적이고 건강한 아름다움과 기독교 사상을 상징적인 삭면 구성을 통해 융합하는 작업을 펼쳤으며, 단순한 자연의 외관이 아닌 내면에서 바라본 감흥과 교감을 강렬한 색채와 대담한 터치로 표현한 빈센트 반 고흐, 최초의 포스터인 

〈물랭 루주-라 굴취 Moulin Rouge-La Goulue>를 제작했으며 엄청나게 빠른 필치로 어두운 파리의 뒷골목 문화를 기록한 틀르주 로트렉 등은 미술의 역사에서 

영원히 꺼지지 않는 <벨 에포크>의 주역들이다. 


까마귀가 나는 밀밭. 빈센트 반 고흐. 후기 인상주의     


신의 날. 폴 고갱. 후기 인상주의     


무대에서의 발레 연습. 에드가 드가. 후기 인상주의     


물랭 루주. 틀 루주 로트렉. 후기 인상주의     



평론가 루이 보셀이 그 거침없는 표현방식과 원색의 향연이 마치 야수와 같다고 

칭한 마티스와 블라맹크, 드랭 등의 야수파가 잠시 등장한다. 야수파의 작품들은 

자연스러운 듯 보이는 형태, 빛과 색채에서 완전한 결별을 고한다. 그들은 오히려 

폭발하는 내면의 감정을 과감한 색으로 분출해내기 위해 사물의 외관을 빌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원색의 향연을 펼쳤다. 


마티스의 초상. 앙드레 드랭. 야수파     


말리 르 루와 레스토랑. 블라맹크. 야수파     


붉은 조화. 마티스. 야수파     



아프리카 원시 미술과 세잔의 다시점적 화면 구성의 영향을 받은 입체파

브라크와 피카소는 인간의 시감각의 한계 – 한 번에 사물의 한 면밖에 볼 수 없다 –를 극복하고자 다각도에서 본 대상의 여러 면을 한 화면에 융화시키는 작업에 

의기투합한다. 회화의 바탕은 2차원의 평면이라는 사실에 입각해서 전통적인 표현방식인 원근법의 환영 주의가 갖는 한계를 뛰어넘고자 하는 다양한 시도를 펼쳤다. 

초기에는 작은 입방체 (little cubes – 여기에서 입체파라는 명칭이 유래한다)들로 

분해를 시도하는 분석적 시기와, 콜라주 같이 다른 사물들과의 결합을 통해 종합하는 시기로 이어진다. 세잔의 다시점적 화면 구성법에서 영향을 받은 입체파의 표현방식은 이집트 미술의 기본 양식인 <정면성의 원리>에서 그 원류를 찾아볼 수 있다. 


바이올린과 물병. 조르주 브라크. 입체파    



구태의연한 기존 미술계의 표현방식들을 거부하고 아르누보의 장식적 요소와 상징주의를 관능미에 융화시킨 클림트, 삶과 죽음, 원초적 성애에의 탐닉과 영원한 사랑 사이의 갈등과 불안을 강렬하고 대담하게 표현한 에곤 실레와 코코슈카의 분리파가 

오스트리아 비엔나를 중심으로 다양한 유파들의 한 축을 형성한다.  


죽음과 처녀. 에곤 쉴레. 분리파     


아돌프 루스의 초상. 오스카 코코슈카. 분리파     



‘예술은 과거를 파괴하고 속도와 기계동력의 유쾌함을 찬양해야 한다. 폭발하듯 

숨을 내쉬는 뱀 같은 파이프로 덮개를 장식한 경주용 자동차 포탄 위에 올라탄 듯 

으르렁거리는 자동차는 날개 달린 사모트라케의 승리의 여신상보다 더 아름답다.’ 

1909년 2월 프랑스의 유력 신문 르 피가로에 발표한 미래주의 

선언문의 내용 일부다. 20세기 초 이탈리아의 정치 문화적 무기력을 극복하고 19세기 중엽에 있었던 독립투쟁시기의 활력을 회복하자는 슬로건을 중심으로 미술가들이 

집결하여 기계문명, 속도를 찬양하며 일체의 과거에 사로잡힌 것들 – 박물관, 도서관, 아카데미 등 - 을 파괴하고 새로운 문화를 세울 것을 주장한다. 예술에서의 

윤리성이 배제된 미래주의자들은 결국 파시즘에 경도되기도 했으나 이후 

러시아 미술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줄에 묶인 개의 역동성. 자코모 발라. 미래파    


도시의 반란. 움베르토 보초니. 미래파    



1905년 독일의 드레스덴에서 키르히너, 카를 로틀루프 등이 모여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과거와의 단절과 예술의 혁명적 미래를 잇는 다리가 되겠다는 선언을 한다. 

야심 찬 선언만큼이나 뚜렷한 개성으로 타락한 부르주와의 도덕성과 물질문명을 

비판하는 한편, 전쟁 전후 독일의 불안과 좌절, 절망과 도피 등을 꿈꾼 

다리파(디 브뤼케)와 칸딘스키의 작품에서 유래되어 후에 추상미술에 영향을 끼치는 

청기사파까지 표현주의적 계열이 대세를 이루는 가운데,


군인이 된 자화상. 키르히너. 다리파 미술

    

가방을 들고 있는 여인. 카를 로틀루프. 다리파 미술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을 전후로 칸딘스키, 피트 몬드리안 등은 사물의 입체적 재현을 완벽하게 해체하고 평면성의 회복을 통한 미술의 본질을 표현하는 추상 미술을 

탄생시킨다. 두 사람은 거의 같은 시기에 작품 활동을 했지만 구현하고자 한 조형적 

방향은 차이가 컸다. 칸딘스키는 단순하고 다양한 도형과 선 등으로 리드미컬한 음악적 배치를 통한 표현주의적 추상미술을, 몬드리안은 삼원색과 검은 선의 수직 수평적 구성을 통한 기하학적 추상미술을 추구했다. 말레비치의 절대적 구성주의 회화는 더 극단적으로 나아가 단 하나의 색과 면, 선 등으로 회화의 본질을 형상화하며 이후 

미니멀리즘 미술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검은 사각형 안에서. 바실리 칸딘스키. 추상주의     


빨강 파랑 노랑의 구성. 피트 몬드리안. 추상주의     


빨간 사각형. 말레비치. 절대적 구성주의     



유럽의 근대사회를 떠받치고 있던 이성주의가 오히려 자연성과 자유를 억압하고 

억압된 자유는 결국, 인간 내면에 눌러둔 야만성과 광기를 폭발시키게 된다. 

이성적 합리주의를 표방한 억압과 통제는 전 유럽 사회를 카오스로 빠뜨린 1차 세계 대전이라는 최악의 결과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 이성적 세계 건설의 신화에 대한 배신감, 좌절과 무력감에 젖어있던 예술가들은 프로이트에 의해 창시된 무의식 이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초현실주의 미술을 태동시킨다. 

앙드레 브르통은 <초현실주의 선언>을 통해 현실을 떠받치고 있는 것은 인간의 이성 - 의식세계 -가 아닌 내면 깊숙한 곳에 가라앉은 무의식의 세계이며, 이를 의식의 표면

위로 끄집어내 표현해야 하는 것만이 예술이 나아갈 길임을 천명한다. 

초현실주의자들은 그간의 미술이 다루어오던 것들은 거짓된 환영에 불과했으며 

억압됐던 무의식의 세계를 의식의 표면 위로 드러낼 때 비로소 진실에 가깝게 

다가갈 수 있다고 믿었다. 막스 에른스트, 조르조 데 키리코, 르네 마그리트, 호안 미로, 살바도르 달리 등의 많은 작가들이 꿈, 환영, 우연, 왜곡, 신화의 차용, 현실과 비현실의 대비 등을 끌어들여 현실을 아슬아슬하게 지탱하고 있는 허위의식과 부조리 등을 

폭로했다. 또한 오늘날의 미술계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많은 조형 방법들을 창안하고 제시했으니, 

사물의 파편이나 나뭇잎 위에 종이를 덮고 연필이나 목탄 등의 도구로 문질러 우연히 드러난 흔적들을 이용하는 프로타주, 매끄러운 종이 위에 물감 등을 아무렇게나 

펴 바르고 다른 종이를 이용해서 똑같이 찍어낸 뒤 그림을 덧 그려낸 데칼코마니, 

전혀 다른 성질의 매체를 결합시키거나 원래 있어야 할 사물 따위를 

 낯선 공간에 배치하는 등 꿈과 상상 속에서나 실현될 수 있을 법한 화면 구성을 

통해 타성에 젖은 의식세계에 심미적·심리적 충격을 가해 주의를 환기시키고자 하는 

데페이즈망 등이 바로 그것이다.  


내전의 예감. 살바도르 달리. 초현실주의 미술    


성 안토니우스의 유혹. 막스 에른스트. 초현실주의 미술    


거리의 신비와 우울. 조르조 데 키리코. 초현실주의 미술    

                                       

                                   



<아름답다>라는 개념은 인위적인 것이다. 

그것은 본능도, 선험적으로 형성되어 있는 관념도 아니다. 

순간적이며 특정한 시공간 속에서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는 미적 감정은 그 대상의 

비례, 조화, 명료함 등을 전제조건으로 삼으며, 대상과 내가 안정적인 관계라고 느끼는 일종의 쾌감에서 비롯된다. 강 건너 불구경은 불 속에서가 아니라 강 건너 멀리 떨어져 있을 때 가능한 감흥이고, 밤하늘에 비처럼 쏟아지는 별똥별은 수십억 광년 떨어져 

있는 공간과 시간대에서나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불이 강을 건너오거나, 별똥별이 내가 있는 지역으로 다가오는 순간, 그것들은 아름답기는커녕 생명을 앗아갈 수 있는 엄청난 위협과 공포가 되는 것이다. 미의 대표적 

표상인 8등신의 비너스가 아시아의 동쪽에 있는 수백 년 전 조선에 나타났다면 과연 

어떤 반응이 일어날 것인지 크게 고민하지 않아도 될 듯싶다. 


미술은 동굴, 왕궁과 무덤, 교회의 천장과 유리창을 장식하고 있었을 때뿐만 아니라, 

일상의 모든 영역에서 벗어나 미술관으로 들어갔을 때도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창작되지 않았다. 또한 미술의 역사는 ‘더 아름다운 것’이 ‘덜 아름다운 것’을 

극복하고 폐기해온 연대기적 서술사가 아니다. 

당대 인간사회의 이해와 요구에 부응하는 첨단의 문화적 도구로써 동시에, 

시대마다의 모순과 한계를 타계해온 전위적 역할로써의 기록이 미술의 역사인 것이다. <벨 에포크>의 그 ‘아름다웠던 시절’의 수많은 유파의 미술가들은, 지배계급이 

자신들의 권력을 지속적으로 정당화하거나 강화시키기 위해 사용하던 비례와 균제라는 창작 방법의 기준을 가차 없이 파기해버렸다. 그들에게는 근대 이전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안정감이나 황금비율, 극적 구도 따위는 더 이상 예술이 세상의 진실을 

드러내는 데 하등의 필요도 없는 불순물에 불과한 것이었다. 미술가들은 야외로 나가 빛과 색채에 대한 새로운 실험을 통해 미술의 출로를 모색했으며, 더 이상 구체적인 

형상을 그리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이유로 색과 선, 기하학적 도형만으로 새로운 창작의 돌파구를 열기도 했고, 비정형적인 구도와 정제되지 않은 붓질로 절망, 분노, 좌절, 

불안, 도피 따위를 가감 없이 드러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인간 세계가 직면하고 경험한 바, 부조리한 권력과 제도에 의해 자행되는 폭력과 야만 앞에 좌절하지 않는 미술가들의 모험적이며 실천적 태도와 목숨을 걸고 이룩해놓은 수많은 작품들과 예술 세계는 

감히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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