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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한경 Mar 27. 2021

미술은 아름다움을 추구하지 않았다

순수. 천사. 노을에 대한 통념


3. 노을이 아름다운 것인가 아니면, 아름다운 것이 

노을인가?


여기 저녁노을을 배경으로 그린 유명한 작품 두 개가 있다. 하나는 바르비종 화파라 

불리는 밀레의 <만종>과 다른 하나는, 20세기를 대표하는 표현주의 미술의 길을 

열어 준 뭉크의 <절규>이다. 


외견상의 통념으로는 밀레의 <만종>에 나오는 노을의 모습이 아름답게 느껴질 것이다. 아니 두 그림을 놓고 어떤 것이 아름다운가라는 질문은 어리석기 그지없을 수도 있다. 너무나도 당연한 것을 묻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정말 당연한 것인가? 우리가 

무의식적일 만큼 당연하게 선택하게 되는 밀레의 노을은 왜 아름다운가?


그 이유는 무엇보다 익숙함 때문일 것이다. 그림의 배경에는 우리가 보통 아름답다고 느끼고 생각하는 노을의 모습이 아주 잘 드러나 있다. 조화로운 색채로 사실에 가깝게 재현했으며, 얼굴의 표정이 잘 드러나지 않을 정도로 어둡게 처리된 농사꾼 부부의 

어깨와 등 뒤로 은은하게 스며든 역광이 경건함과 엄숙함을 더해주기 때문이다. 신성한 노동을 마친 농부의 기도에 후광을 비쳐주는 해 질 녘 노을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만종. 장 프랑수와 밀레. 바르비종파    


이에 반해, 뭉크가 그린 <절규> 속의 주인공은 너무도 놀라고 당황해서 곧 

터질 것 같이 일그러진 표정으로 클로즈업되어있다. 무엇인가에 질려버려 차마 악! 

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질려버린 모습이다. 그런 주인공의 뒤로 강물과 함께 넘실대며 곧장 다리 위의 사람들을 덮쳐올 것 같은 핏빛 노을이 악마의 혓바닥처럼 작품 전체를 휘감고 있다. 미술작품을 감상하는 것은 매우 상대적이긴 하지만, 뭉크의 노을이 

아름답다고 한다면 당장 뒤통수에 쏟아지는 우려와 의심의 눈초리들이 노을처럼 

붉게 타오를 것이 틀림없다.


절규. 에드바르트 뭉크. 표현주의    



노을은 아름답다고 하는 관념화된 공식은 결코 미술작품을 감상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 상투어 구일뿐이다. 밀레의 <만종>과 뭉크의 <절규> 속의 노을 이면에 드리운 

사실은, 슬픔과 경악이지 결코 아름다움과는 무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통념과 선입견에 가려진 노을의 진실은 과학기술의 힘과 발달된 정보에 의해서 

드러날 수 있었다. 


밀레의 <만종>은 신성한 노동을 끝마친 부부가 신에 대한 경건한 감사의 기도를 올리는 평화롭고 아름다운 장면이 아니었다. 엑스레이로 촬영한 밀레의 작품 하단에 

놓인 바구니에는 죽은 아이의 시신이 그려졌다 지워진 흔적이 뚜렷하게 있었다.  

아마도 밀레는 굶어 죽은 아이를 묻기 직전 어머니와 아버지의 마지막 기도의 장면을 그렸던 것 같다. 하지만 당시 최하층 계급인 농사꾼 부부가 굶어 죽은 자신의 아이를 

제대로 된 장례식조차 치를 수 없어, 감자 바구니에 담아 매장해야만 하는 비참한 삶을 사실적이고도 엄숙한 아름다움이 넘쳐흐르도록 그린다는 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당시에는 죽음과 매장이라는 주제의 그림은 위인이나 영웅들만의 몫이었던 것이다. 당연히 온갖 비난과 압박 속에 아이의 스케치는 지워지고 대신, 농부들에게 최고의 일용할 양식인 감자가 담기는 거짓 작품이 완성된 것이다. 

아마도 <만종>의 노을은 아름답기는커녕 죽은 아이를 

애통해야 할 겨를조차도 없었을 것이다.  


뭉크의 <절규>는 두 가지 해석이 존재한다. 늘 불안과 공포심에 사로잡혀 있던 뭉크의 내면의 모습이 폭발하는 장면을 그린 것이라는 해석이 그 하나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1883년에 인도네시아에서 발생한 대규모 화산 폭발로 인해 실제 유럽 전역의 하늘까지 피처럼 붉게 물들어 엄청난 공포심을 불러일으킨 장면을 표현한 것이라는 해석이다. 

전자든 후자든 노을은 금방이라도 강을 타고 다리 위의 사람들을 덮칠 만큼 위협적으로 넘실대고 있을 뿐, 화면 그 어디에도 아름다움이 끼어 들 틈은 조금도 없어 보인다.  



칸트를 비롯한 18세기의 서양 철학자들은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 또는 아름답다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은 인간이 타고난 것이라 정의한다. 그래서 세상의 반대편에 있더라도 일출과 황혼 무렵의 하늘을 똑같이 아름답다고 느끼고, 봄바람에 꽃무리가 비처럼 흩날리는 광경에 똑같이 도취되는 공통의 감정을 느낀다는 것이다. 

<아름답다>라는 

공통 감각은 이처럼 인간의 타고난 본능과 같은 것이며, 미술은 내재된 본능이 

개념화되어 시각적 양식으로 발현된 것이라 한다. 이러한 미학적 견해가 미술은, 

칸트의 정언명령처럼 ‘욕망하지 않으며 미술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야 만하는’ 

일체의 개인적 계급적 이해관계가 끼어들지 않는 순수한 아름다움만을 추구해야 한다는 도그마(dogma)로 자리 잡게 된다. 대체로 이 시기부터 미술은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예술이라고 가르치고 배워왔을 것이다.  


누군가는 해질 무렵 붉은 노을이 아름답게 느껴지며 노을은 아름다운 것이라고 정의 

내릴 수 있다. 하지만 노을을 아름답게 표현한 미술작품은 아름답게 느끼는 

미적 본능으로 인한 것인가? 아니면, 노을은 원래부터 아름다웠기 때문에 아름답게 

표현해야만 하는 것이기 때문인가? 더 나가서 미술은, 미술작품은 정말로 아름다움을 

추구해왔는가? 우리가 미술을 떠올릴 때 자동적으로 연상되는 ‘아름다움’이라는 단어는 인간의 내적 본능에 의한 것인가 아니면, 이 또한 편향적이며 고도의 전략적 학습에 

의한 것인가? 프랑스혁명 이후 지금까지, 모든 권력과 권위로부터 탈피한 듯 보이는 

서양 미술의 역사는 

과연 

자유로운 천재적 개인들이 진정으로 순수한 <아름다움>을 꽃피운 시간들이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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