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의 소개팅

단편소설8

by 최지윤

정선은 남편과 사별한 지 곧 십일 년이 되어간다.

정선은 가끔 그 숫자를 세다가도, 어느 순간부터는 세기를 그만두었다.그날 오후에도, 집 안은 조용했다.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와 냉장고에서 나는 낮은 진동음만이 벽을 타고 흘렀다.휴대폰이 진동했다.

화면에는 오래전부터 그대로인 이름이 떠 있었다.

‘미숙.’“너, 오늘 뭐 해?”전화를 받자마자 들이닥친 친구의 목소리는, 집 안의 고요와 잘 어울리지 않았다.“나? 그냥… 집에 있지.”“또?”

미숙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

“야, 너는 진짜 젊고 예쁜 게 죄야. 왜 이렇게 혼자 있으려고만 해.”이 말은 십 일년 동안 셀 수 없이 들은 문장 중 하나였다.

정선은 대답 대신 웃음소리 비슷한 것을 흘렸다.“그냥 편해서 그래. 혼자 사는 게.”“편하긴 뭐가 편해. 사람이 그러다 진짜 혼자 묻히겠다.”

잠시 뜸을 들이더니, 미숙이 본론을 꺼냈다.

“소개팅 한번 해볼래?”“또 시작이다.”

정선은 자동으로 얼굴을 찌푸렸다.“야, 들어만 봐. 이번엔 진짜 너 말한 조건 딱 맞는 사람이야.”조건.

정선이 언젠가 제주도 여행을 같이 갔을 때 술김에 했던 말이 떠올랐다.그때도 비슷한 대화였다.

호텔 창가에서 밤바다를 내려다보며, 미숙은 왜 좋은 사람 만나볼 생각을 안 하냐고, 언제까지 혼자 살 거냐고, 계속해서 아쉬워했다.그때 정선은 맥주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난 총각도 싫고, 이혼남도 싫어.”“그럼 도대체 누굴 만나라는 거야?”“기왕이면…”

정선은 한참 말끝을 맴돌다 겨우 말을 이었다.

“나랑 같은 사람. 사별한 사람.”“왜 꼭 사별이야?”“그래야 서로 상실이 뭔지, 좀은 알지 않겠어?

누군가를 떠나보낸 사람하고, 그냥 떠나보낸 사람은… 마음의 결이 좀 다르거든.”그때 미숙은 한동안 아무 말도 없다가, 어딘가에서 무언가를 끌어올리듯 말했다.“있다. 그런 사람. 너 말한 조건 딱 맞는 사람.”“어디에.”“예전에 모임에서 한 번 봤는데, 나도 인상이 너무 좋았거든. 사별한 지 꽤 됐다고 들었고.” “그러니까, 이름은?”“이름은 생각나는데 연락처가 없어. 그 모임도 이제 안 나가고.”그때 정선은 그냥 웃으며 넘겼다.“인연 있으면 보겠지, 뭐.”그 말은 두 사람 사이에서 농담처럼 흘러가 버렸다.그리고 시간이 흘러, 다시 지금.“기억나? 그때 제주도에서 너한테 말했던 사람.”

미숙의 목소리가 휴대폰 너머에서 들렸다.정선은 휴대폰을 귀에 댄 채, 거실 한쪽에 놓인 남편의 사진을 흘끗 보았다.

검은 리본이 달린 액자 속, 아직 서른 후반이던 남자의 웃음이 거기 그대로 있었다.“…어렴풋이.”“그 사람이야. 우연히 다시 연락이 닿았어.”

미숙의 목소리가 조금 밝아졌다.

“사별했고, 애는 없고, 나이는 우리보다 두 살 위. 직장도 괜찮고, 무엇보다 성격이 진짜 조용하고 성실해 보여.” 정선은 말없이 소파 등받이에 기댔다.“그래도… 미안하지만, 나 아직도 그 사람 얘기만 나오면 조금 숨이 막혀.”“알지.”

미숙이 조용히 말했다.

“그렇지만… 십일 년이야, 정선아.”십일이라는 숫자는, 마치 누군가가 건네는 일종의 허락처럼 들렸다.“이번 주말에 셋이 점심 한번 먹자. 부담되면 그냥 친구 만나는 셈치고 나와. 싫으면 그 자리에서 끊어도 되고.”정선은 한참 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시계를 한 번 보고, 창밖을 한 번 보고, 다시 남편 사진을 한 번 보았다.사진 속 남편의 웃음은, 언제나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점심이면… 한두 시간?”“그치. 밥 한 끼 시간이면 충분하지 뭐.”정선은 그제야 아주 작게 웃었다.“알았어. 인연이 있으면 보고, 아니면 밥이나 먹고 오는 거지 뭐.”점심 약속 장소는, 미숙이 자주 가는 파스타 집이었다.정선이 도착했을 때, 미숙은 이미 창가 자리에 앉아 있었다.

맞은편에는 낯선 남자가 앉아 있었다.“왔다, 왔다.”

미숙이 손을 흔들었다.

“정선아, 여기. 인사해, 이쪽은 윤석 씨.”남자는 자리에서 살짝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검은 니트와 단정한 안경테, 조용해 보이는 인상이었다.“안녕하세요.”자리에는 물잔과 메뉴판이 놓여 있었고, 빵 바구니 하나가 반쯤 비어 있었다.

이미 둘만의 시간이 잠깐 흐른 뒤라는 걸 정선은 뒤늦게 느꼈다. “주문은 대충 했어. 파스타 두 개랑 리조또 하나.”

미숙이 말했다.식사가 나오기 전까지, 대화는 주로 미숙이 이끌었다.

모임 얘기, 제주도 얘기, 날씨 얘기.

두 사람은 합을 맞추듯 리액션을 했고, 정선과 윤석은 그 사이사이에 짧게 “아, 그렇군요”를 끼워 넣었다.음식이 나오자, 한동안은 접시와 포크가 자리를 대신 채웠다.“어때, 여기 음식? 괜찮지?”“응, 맛있네.”“윤석 씨는 입에 맞아요?”“네.


괜찮네요.”대답들은 모두 적당했다.한 접시가 거의 비워질 즈음, 미숙이 갑자기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아, 큰일 났다.”“왜?”“회사에서 연락 왔어. 미팅을 깜빡했네. 나 잠깐 다녀와야 할 것 같아.”정선은 눈을 가늘게 떴다.“야, 너 갑자기 왜—”“금방 끝날 수도 있어. 안 끝나면… 음, 너희 둘이 커피라도 마시고 있어. 공통분모 많잖아.”

미숙은 웃으며, 거의 도망치듯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그렇게 미숙이 나가고 나자, 테이블 위에는 접시 세 개와 컵 세 개, 그리고 사람 둘만 남았다.잠시, 물잔에 맺힌 물방울만이 움직였다.윤석이 먼저 입을 열었다.“불편하셨죠.”정선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뭐, 이런 자리… 자주 있는 일은 아니라서 그렇죠.”“저도 그렇습니다.”

윤석이 조용히 웃었다.

“소개팅 같은 거, 잘 안 나오는 편이라.”그 웃음에는 어딘가 힘이 빠져 있었다.잠시 후, 윤석이 포크를 내려놓았다.“솔직히 말씀드려도 될까요?”“네.”“저, 사실… 요즘 만나는 사람이 있습니다.”그 말은 생각보다 훨씬 담담하게 떨어졌다.

정선의 귀에는 물 속에서 들리는 말처럼 약간 둔탁하게 들렸다. “아…”“미숙 씨가 좋은 사람이라고, 한번 얼굴이라도 보자고 해서 나왔어요.

그리고… 조금 궁금하기도 했고요.”“궁금하다니요?”“같이 사별한 사람.”

윤석이 단어를 천천히 골라 입 밖으로 꺼냈다.

“저도 꽤 됐거든요. 그 일 겪은 지.”정선은 그제야 그의 눈을 제대로 바라봤다.

문장을 고르느라 생기는 짧은 침묵, 끝까지 말하지 않고 남겨두는 부분들이 어딘가 익숙했다.“그래서… 나왔어요.

나오지 말았어야 할 자리인 건 아는데.”정선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식당 안 다른 테이블들에서 웃음소리와 식기 부딪히는 소리가 흩어져 왔다.“…화나세요?”

윤석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글쎄요.”

정선이 작게 웃었다.

“뭐라 말해야 할지 잘 모르겠네요.”크게 상처 받았다기보다는, ‘역시 인연이라는 건 이런 식으로 비켜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윤석이 고개를 끄덕였다.“저는… 요즘 만나는 사람 덕분에 조금 위로를 받고 있어요.

처음에는 죄책감도 많이 들었는데, 그래도 살아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고, 그렇게 생각하게 되더라고요.”그 문장은, 정선이 스스로에게 수없이 되뇌었던 말과 비슷했다.“그래서, 같은 경험을 한 사람을 한번 만나보고 싶었어요.

사별한 사람들끼리만 통하는 감정이 있잖아요. 말로 다 설명하지 않아도, 한두 마디만 해도 알게 되는 것들.” 정선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그건… 저도 알아요.”둘 사이에 잠깐, 말 없는 공감이 흘렀다.“미안합니다.”

윤석이 말했다.

“지금 생각하면, 나오지 말았어야 할 자리였어요.

근데… 그래도 오늘 나온 게, 후회만 되는 건 또 아니네요.”“왜요?”“덕분에, 제가 느끼는 게 이상한 게 아니라는 걸 조금 확인한 것 같아서요.

그리고…”

그는 말을 고르다 덧붙였다.

“정선 씨도 언젠가는 조금 덜 아플 날이 올 거라고, 괜히 그런 생각도 들고.”정선은 그 말에 잠깐 눈을 내리깔았다.“글쎄요. 덜 아픈 건지, 아픈 자리가 굳어지는 건지, 요즘은 잘 모르겠어요.” 윤석은 그 말을 조용히 받아들였다.“혹시, 괜찮으시다면… 오늘 이 자리 말고, 그냥 같은 경험을 한 사람으로서, 가끔 안부 정도 주고받는 사이로 지낼 수 있을까요?”정선은 고개를 들었다.“좋은 사람이랑 만나고 계신다면서요.”“네.”

윤석이 솔직하게 인정했다.

“그래도, 그 사람에게도 쉽게 꺼내지 못하는 얘기들이 있거든요.

그런 얘기들은… 같은 곳을 한번 지나간 사람들끼리 나눌 수 있지 않을까 해서요.” 그 말은 어설픈 부탁에 가까웠다.정선은 잠시 생각하다가, 아주 얇은 미소를 지었다.“연락처, 주고받는다고 해서 꼭 자주 연락해야 하는 건 아니죠.”“그렇죠.”“좋아요. 좋은 관계까진 잘 모르겠고… 가끔, 안부 정도는.”휴대폰이 테이블 위에 나란히 놓였다.

두 사람은 서로의 번호를 천천히 입력했다.저장할 이름을 고르는 화면에서, 정선은 한동안 멈춰 있었다.

여러 단어들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결국, 그녀는 단순히 이름 두 글자만 적었다.윤석.집에 돌아오는 길, 버스 창밖으로 오후 햇빛이 흘렀다.

정선은 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잠깐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현관문을 열자, 집 안의 공기는 나가기 전과 거의 달라진 게 없었다.

난방이 켜진 거실, 식탁 위에 접어 놓은 우편물, 책상 위에 엎어 놓은 책 한 권.신발을 벗고 들어가면서, 정선은 무의식적으로 남편 사진부터 향했다. 액자 앞에 먼지가 얇게 쌓여 있었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액자 가장자리를 한 번 쓸어내렸다.“오늘…”

입술이 아주 약하게 움직였다.

“오늘, 당신 얘기를 조금 했어.”그 말은 소리로 완전히 나오지 못한 채, 입안에서 흩어졌다. 정선은 소파에 앉아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연락처 목록을 열어, 새로 추가된 이름을 찾았다.윤석.그 이름을 터치하면, 통화 버튼과 메시지 버튼이 뜰 것이다.

정선은 잠시 화면을 내려다보았다.어디선가, 누군가의 목소리가 떠오르는 것 같았다.‘자그만치 십일년이야, 정선아.’속으로 되뇌었다그렇다고 해서, 오늘 당장 누군가에게 마음을 열 준비가 된 것은 아니었다.

슬픔이란, 어느 날 갑자기 끝나 주지 않는다는 것을 정선은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결국 아무 버튼도 누르지 않았다.

그저 화면을 끄고, 휴대폰을 테이블 위에 엎어 놓았다.거실은 다시 조용해졌다.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와 냉장고의 낮은 진동음이, 아까와 똑같이 벽을 타고 흘렀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연락처 목록 어딘가에 이름 두 글자가 더해졌다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마음 어딘가, 아주 깊은 곳에서

언젠가, 아주 먼 훗날에라도 다시 누군가의 이름을 눌러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아주 얇게, 한 겹 정도만 생겨났다는 것뿐이었다.

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