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문 너머의 서계

단편소설9

by 최지윤


“딩동—”


초인종 소리에 민혁의 시선이 창문 너머로 향했다.

문 앞에는 커다란 택배 상자가 놓여 있었다. 포장지에는 로고도, 발신인 표시도 없었다. 낯선 침묵이 문틈으로 스며드는 듯했다.민혁이 휴대폰을 들어 친구에게 전화를 걸려던 순간, 상자 입구 사이로 흰 캔버스 가장자리가 살짝 고개를 내밀었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 상자를 끌어안고 거실로 들였다.“이게 뭐지…?”옆에서 함께 상자를 열던 친구가 낮게 중얼거렸다. 목소리에는 긴장과 호기심이 뒤섞여 있었다.

포장지를 걷어내자, 커다란 그림이 모습을 드러냈다.캔버스 속 풍경은 현실에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언덕과 나무, 작은 집과 길뿐인데, 색의 농담 사이로 알 수 없는 냉기와 평온이 동시에 배어 나왔다.“이상하네… 근데 예쁘다. 여기, 집 속에 누가 있어. 쳐다보네, 봐봐.”친구가 캔버스 앞으로 다가갔다. 몸을 숙여 그림 속의 누군가와 눈을 맞추는 순간, 공기가 살짝 찢어지는 듯 친구의 몸이 앞으로 휙 끌려갔다.“야!”민혁이 팔을 뻗었지만, 손끝이 닿기도 전에 친구는 캔버스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가 버렸다.

방 안에는 민혁의 거친 숨소리와, 벽에 걸린 시계 초침 소리만 남았다. 남은 건, 미세하게 출렁이는 그림뿐이었다. 그림 속 언덕과 나무는 조금씩 흔들리며, 마치 살아 있는 풍경처럼 숨을 쉬는 것 같았다.

그때 고양이가 조용히 캔버스 앞으로 걸어갔다. 화면을 유심히 바라보더니, 코를 킁킁거리며 몸을 바짝 붙였다.민혁은 숨을 죽이고 뒤를 따랐다.

눈앞에 믿기 어려운 광경이 펼쳐졌다.그림 속, 언덕 아래 그늘진 나무 옆에 친구가 서 있었다.

그림 속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고양이는 순식간에 민혁의 눈앞에서 그림 속으로 빨려 들어가 버렸다.

놀라서 쫓아간 민혁이 다시 그림을 보자, 친구의 팔 안에는 이미 고양이가 안겨 있었다. 현실의 것과 똑같은 무늬, 똑같은 눈동자였다.친구의 얼굴에는 두려움보다 낯선 평온함이 떠올라 있었다.

머릿속이 하얘진 민혁은 오래전에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림 속 인물과 눈이 마주치면, 현실과의 경계가 무너진대….’그는 캔버스에 바짝 다가가 그림 속 친구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림 속 풍경이 흔들리더니, 친구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민혁을 바라보았다.두 사람의 시선이 겹치는 순간, 눈부신 빛이 캔버스에서 폭발하듯 번졌다.민혁은 반사적으로 팔로 얼굴을 가렸다.

조심스럽게 눈을 떴을 때, 친구가 그림 밖으로 나와 있었다. 고양이를 꼭 안은 채, 마치 긴 잠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하아… 여기가… 다시…”친구는 주변을 둘러보며 현실의 공기를 가늠했다. 표정에는 안도와 어지러움,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아쉬움이 섞여 있었다. 잠시 후, 그림은 다시 고요를 되찾았다.

캔버스 속 풍경은 더 이상 심하게 흔들리지 않았다.민혁은 곧 깨달았다. 이 그림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었다.

몇 번의 관찰 끝에 하나의 규칙이 분명해졌다.캔버스 속으로 빨려 들어간 사람은, 스스로 나오고자 하는 의지가 없으면 밖으로 나올 수 없다. 어느 날, 친구는 다시 그림 속으로 사라졌다.

민혁이 말릴 틈도 없이, 그의 몸은 서서히 투명해지더니 화면 속 풍경과 뒤섞여 들어갔다.민혁은 친구를 불러보았다.“야! 나와 봐, 들려? 여기야!”그러나 대답은 없었다.

그림 속 친구는 언덕 위 나무 아래에서 고양이를 안고 햇빛을 쐬고 있을 뿐이었다.평온해 보였다. 너무나도.민혁은 그 평온함이 불길하다고 느꼈다.

현실의 긴장과 피로에서 완전히 벗어난 얼굴. 일과 관계, 경쟁, 실수에 대한 두려움이 하나도 비치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때 이해했다.

그림 속 세계는 단순한 휴식처가 아니라, 현실의 모든 요구와 기대에서 벗어난 안주와 은둔의 공간이라는 것을. 친구의 눈동자에는 망설임이 아닌, ‘여기에 남고 싶다’는 결심이 깃들어 있었다.

민혁이 아무리 끌어내리려 해도, 그림은 단단히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그럼… 네가 원할 때만 나올 수 있는 거구나.”민혁이 낮게 속삭였다.

그림 속 친구가 작은 고개 끄덕임으로 응답하는 것 같았다.그제야 민혁은 확실히 깨달았다.

그림 속과 현실의 경계는 단순한 물리적 차원이 아니라, 의지와 선택의 문제라는 것을. 그날 이후, 민혁은 그림 앞에 서기 전 꼭 선글라스를 꺼내 쓰는 버릇이 생겼다.

그림 속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면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 세계를 계속 보고 싶어서이기도 했다.짙은 렌즈 너머 풍경은 조금 어두워졌지만, 오히려 마음 놓고 오래 바라볼 수 있었다.

고양이를 안은 친구는 햇빛 아래에서 낮잠을 자거나, 바람 부는 언덕을 천천히 거닐었다.점차 그림 속에는 현실에서 사라졌던 얼굴들이 하나둘 늘어났다.

서로를 재촉하지 않고, 아무도 떠나려 하지 않았다. 민혁은 혼자 피식 웃었다.

그림 속 세계에 들어가진 않았지만, 그들의 하루를 빠짐없이 지켜보며, 마치 창문 너머 이웃을 구경하듯 정을 붙이고 있었다

.“나도… 절반쯤은 저기에 사는 건가.”현실의 방 안, 불 꺼진 거실.

캔버스 앞에 선, 선글라스를 낀 민혁.그는 알았다.

선글라스는 단순한 보호막이 아니라, 거리를 유지한 채 그들에게 소속되고 싶어 하는 마음의 마지막 장치라는 것을. 완전히 그 안으로 들어가고 싶진 않지만, 완전히 바깥에 서 있고 싶지도 않은 애매한 욕망.그림 속 친구가 고양이를 안고 무심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선글라스 덕분에 눈은 마주치지 않지만, 민혁은 친구가 자신이 여기에 서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느꼈다.밤이 깊어갈수록 거실 공기는 차가워졌지만, 그림 속은 언제나 해질녘 빛을 머금고 있었다.

현실의 시계는 새벽을 향해 가는데, 그림 속 시간은 멈춘 듯했다. “그래, 너는 거기에 있고… 나는 여기 있을게.”민혁은 조용히 중얼거렸다.그렇게 그림 속 은둔자들과 그림 밖의 관찰자 사이에 묘한 공동체가 만들어졌다.

누구도 완전히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고, 누구도 완전히 밖에 서 있지 않았다.

서로의 경계는 희미하지만, 묘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현실의 창밖 대신, 거실 한가운데 놓인 캔버스가 민혁에게 가장 넓은 창이 되었다.


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