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너를 만났다.
나름 사회생활했다고 마냥 애 같던 모습은 옅어지고 어엿한 어른이 된듯해 보였다.
그럼에도 알맹이는 여전히 변함없이 그때의 너였더라.
너에 대한 나의 마음도 어느 정도 식었을 거라 생각하고
친구 대 친구로서 만나는 거라 생각했지만,
아뿔싸! 변함없는 건 내 마음도 마찬가지더라.
얼마 전에 재밌는 역사책을 읽었다며 히틀러와 레닌의 이야기를 하는 너의 모습이 어찌나 사랑스럽던지.
무슨 히틀러고 무슨 레닌이냐! 남녀가 만나는 자리에 나올법한 소재는 아님에도
그런 이야기가 재밌다며 하는 네 모습이 너무나 좋았다.
다만 아쉽고, 마찬가지로 변함없는 게 있었다.
여전히 남자 친구와 잘 만나고 있다는 너의 근황은
내 마음속 웅덩이에 풍덩 들어가 거친 잔물결을 일으켰다.
마음속 물결이 얼마나 거칠었던지
물결의 파편이 심장을 타고, 목을 타고, 이내 눈에서 생글 맺히더라
붉어지는 눈시울을 보던 너는
내 마음이 여전한 것을 확인했고
가엾다는 눈빛을 내보이며
이내 우리는 침묵했지
침묵이 길어지는 게 싫었던 나는
흔한 시시콜콜한 근황 이야기나 하면서
어떻게든 잘 지낸다고 포장질했고
너는 맞장구 쳐주며 침묵에서 함께 벗어나
그저 평범한 남녀 간의 대화로
아무 관계가 아닌 남녀의 대화로 끝맺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