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설극장 이야기
국민학교 시절의 이야기이다.
나는 남해바닷가의 작은 섬 호도에서 태어나서, 국민학교 들어갈 무렵 더 큰 섬인 남해 본도로 나오게 되었다. 섬에서 섬으로 나왔으나, 전기와 전화. 수도가 설치된 남해 본도는 나에게 비약적인 문명의 세계였다.
등대옆 바닷가에서 자주 놀곤 했는데 저녁이면 바닷가로 쭈욱 뻗은 등대에 어김없이 불빛이 켜졌다. 항구 앞에는 수평선이 아닌 섬들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었고, 배들은 낮은 고동소리를 울리며 불빛을 따라 항구로 들어왔다.
이방인들에게는 감탄을 자아낼 만한 풍경들이었겠지만, 그 시절의 내가 늘 보았던 것 들이었다.
그 당시 섬에서의 아이들의 놀이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바닷가 돌 틈에서 게나 물고기를 잡거나 물장구를 치며 놀았고, 형들 따라 산에 나무를 하러 가기도 했다. 몇 가지 골목놀이(구슬치기, 팽이치기, 자치기)도 흔하게 즐기는 놀이 들이었다.
심심할 때면 아무런 도움이 안 되면서도 거든답시고 부모님의 밭일에 따라다니기도 했었다. 고학년이 되면 대부분 밭일을 하며 부모님의 고된 노동을 도와야 했지만, 막내인 나는 그런 쪽에서는 항상 열외였다. 덤으로 할머니가 챙겨주는 사탕도 독점할 수 있었으니, 지독한 심부름을 빼면 그리 나쁜 위치는 아니었던 것 같다.
작은 학교도서관의 책을 다 읽어버린 나는 늘 새로운 이야기에 대한 갈증이 있었다.
텔레레비전에서 나오는 만화와 영화, 만화방에서 빌려보는 만화책 등을 통해서 접하는 새로운 이야기들에 나의 상상력을 더하며 가상의 세계로 빠져들곤 했었다.
4학년 여름방학을 며칠 앞둔 어느 날이었다.
온 마을에 북소리가 울렸고 온 동네 아이들이 떠들썩하게 몰려다니는 모습이 보였다. 광대 같은 옷을 입은 아저씨가 옷 앞뒤로 영화포스터를 붙이고 마이크를 들고는 북을 치며 마을을 돌고 있었다.
“은하 영화사, 오늘부터 상영합니다. 오늘의 상영작은 철권, 철권입니다.”
대문 앞에 서서 그 광경을 보던 나는 뒤에 서있던 형에게 물었다.
“형님아, 저게 뭔데?”
“영화사 들온 거 아이가. 내는 오늘 저녁에 무조건 보러 가야겠다.”
극장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마을에 영화사가 들어온다는 건 뜻밖이었다. 시골 마을마다 다니며 천막을 치고 영화를 상영하는 가설극장이었다. 마을 공터에 나가보니 벌써부터 천막기둥이 세워져 있었고, 또래 아이들도 그 옆에서 휘황찬란한 포스터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대부분이 홍콩무협영화나 한국액션영화였으며, 벗은 몸을 반쯤 가린 여자의 포스터도 있었다.
그 옆에서 여자흉내를 내며 키득거리던 친구 녀석들이 이야기를 했다.
“포스터 붙인 집은 초대권 두 장씩 준다카더라. 형철이는 두장 받았다고 자랑함 써 댕긴다.”
사람들 왕래가 많은 곳에 영화 포스터를 붙였는데 목 좋은 곳에 자리 잡은 형철이네 과자가게에는 포스터가 붙어있었고, 우리들은 부러운 눈빛으로 형철이를 바라보았다.
저녁이 되자 누나와 형은 모아놓은 용돈으로 영화를 보러 갔다. 나는 너무 보고 싶었지만 그 당시 500원 정도였던 입장료가 내게 있을 리 없었다. 50원씩 가끔 받던 과잣값은 받기 무섭게 단것에 대한 허기를 보충하는데 소비되었고, 나이 터울이 많은 누나와 형에게 나는 어린애로 취급받아 사정을 하소연할 상대도 되지 않았다.
한마디로 “얼라들은 빠져라!”였다.
그날 저녁 죄 없는 텔레비전을 이리저리 돌리던 나는 영화가 끝날 무렵이 되어서야 극장에 가 보았다. 천막 안에서는 간혹 탄식과 웃음이 들렸고, 부딪히는 날카로운 효과음이 바깥까지 울렸다.
세상은 천막 안의 사람과 천막밖의 사람으로만 나뉘어 있었다. 그 순간 천막 밖의 나는 세상 누구보다 못 가진 자(500원)의 비애를 크게 느꼈다.
그런데 영화가 끝날 무렵 갑자기 양쪽 가에 있는 천막이 확 걷혔다. 나는 눈이 휘둥그레지며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내일 할 영화의 예고편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내일 영화는 소림사주방장, 소림사주방장 입니다.”
악당과 주인공이 싸우는 장면이 조금 비치다가 영사기는 꺼졌다.
다음날 학교에 가니 아이들은 온통 영화이야기로 들떠있었다. 영화를 본 소수의 아이들이 마치 개선장군인 마냥 어제 본 영화를 이야기했고, 나머지 아이들은 부러운 듯 입술을 쳐다보고 있었다. 어제 못 본 아이들 중에는 형철이가 가진 초대권을 빌려 위조하겠다는 녀석들도 있었다.
나는 하루 종일 어제 본 그 주인공과 거울갑옷을 입은 악당과의 대결이 궁금해 견딜 수가 없었다. “오늘은 어떡하든지 천막 안으로 들어갈 방법을 찾아야겠다” 나의 마음속에서는 굳센 의지가 불타오르고 있었다.
상영 시작시간은 여덟 시 정도였지만 일찍 저녁을 먹고 영화 시작 훨씬 전부터 극장으로 갔다.
일단 자세히 극장의 구조 전체를 살펴보기로 했다.
사각형 구조의 천막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중간쯤 좁은 입구에는 매표원이 지키고 있었다.
공식적으로 허용된 통로는 거기뿐이었다.
나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마치 범인이 범죄현장을 답사하듯 천막주위를 두어 바퀴 돌았다. 그러다 나와 비슷한 행동을 하는 동네형과 마주쳤다.
두환이 형이었다.
동네에서 소문이 안 좋기로 소문난 형이었는데 그 형의 어머니는 술주정이 심한 아버지 때문에 도망갔고, 아버지는 비 오는 날 뱃일을 나갔다 물에 빠졌는지 돌아오지 못했다. 삼촌 집에서 살고 있었는데 한쪽눈이 약간 찌그러진 표정으로 말하곤 했으며, 손버릇이 안 좋아서 학교에서 일명"대도"라고 불리고 있었다.
나쁜 짓 배운다고 어머니가 절대 가까이하지 말라던 형이었다.
‘어쩌면 우리는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는지 모른다.’
*이 글은 내 어릴 적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입니다.
짧은 글이지만 재미나게 읽고 삶의 조그만 행복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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